[뉴스토마토 윤영혜 기자] 거제조선소의 설계실. 설계자가 3D 모델 일부를 수정하자, 조선소 전체가 미세하게 움직입니다. 현장의 단말기와 로봇 시스템이 동시에 새 좌표를 받아 반응하고, 로봇은 즉각 새로운 궤적을 따라 용접을 이어갑니다. 변화는 다시 설계 화면으로 되돌아와 데이터로 축적됩니다. 삼성중공업의 미래 조선소 모습입니다.
갤럭시XR 기술을 활용해 선박 엔진을 검사하는 모습. (사진=삼성중공업)
클릭하면 갱신…도면 없는 실시간 설계
스마트 조선소는 설계부터 시작됩니다. 삼성중공업은 지난달 업계 최초로 ‘S-EDP(SHI-Engineering Data Platform)’라는 새로운 설계 자동화 플랫폼을 내놓으며,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S-EDP는 1D(수치 데이터)·2D(도면)·3D(입체 모델)를 하나의 데이터 흐름으로 통합한 시스템입니다. 설계자가 3D 모델의 배관 위치나 구조를 수정하면 관련 도면과 자재 리스트가 자동으로 갱신되고, 시스템이 정합성(오류 여부)을 실시간으로 검증합니다.
과거 조선 설계는 부서마다 도면과 문서를 따로 관리해 협업이 지연되고 변경 사항이 제때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도면과 데이터를 다시 대조해야 하는 수작업이 반복되며 오류와 재작업도 적지 않았습니다. S-EDP 도입 이후 이러한 병목은 크게 줄었습니다. 설계 변경이 자동으로 생산 데이터까지 연동되면서 수정·반영 절차가 빨라지고, 협업 속도와 변경 관리 효율도 눈에 띄게 개선됐습니다.
S-EDP는 설계·구매·생산 등 조선소 전반의 시스템을 하나로 묶는 ‘데이터 허브’ 역할도 수행합니다. ‘어댑터(Adapter)’ 기능을 통해 CAD(Computer-Aided Design), PLM(Product Lifecycle Management) 등 기존 시스템과 자동 연계되며, 이로써 프로그램 간 단절로 발생하던 호환성 문제와 데이터 불일치가 크게 줄었습니다.
S-EDP는 웹 기반으로 구축돼 장소 제약도 없습니다. 경기도 성남 R&D 센터와 거제조선소, 해외 설계센터가 같은 선박 모델에 동시에 접속해 설계를 공유·수정할 수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떨어진 거점들이 하나의 플랫폼 안에서 실시간으로 연결되는 셈입니다.
레인보우로보틱스와 기존에 개발한 4족로봇, 이동형 양팔로봇, 협동로봇(왼쪽부터). (사진=삼성중공업)
삼성중공업은 S-EDP를 기반으로 2030년까지 설계 자동화율을 두 배 이상 높이고, 설계·구매·생산을 하나의 데이터 망으로 잇는 ‘스마트 오피스’ 전환을 추진할 예정입니다. 국내외 모든 사업장에 적용하는 동시에, 파트너십을 맺은 해외 조선소에 솔루션 형태로 제공하는 사업화 전략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AI·로봇이 이룬 생산 혁신, SYARD
S-EDP가 설계 데이터를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 ‘디지털 설계 기반’을 만든다면, 다음 단계는 이 설계를 조선소 현장에서 어떻게 구현하느냐입니다. 이를 위해 삼성중공업은 생산 공정을 통합 관리하는 데이터 플랫폼 ‘에스야드(SYARD)’를 구축했습니다.
SYARD는 조선소 곳곳에서 발생하는 설비·장비·자재·인력 정보를 실시간으로 모아 공정 전체를 한 화면에서 관리할 수 있도록 하는 ‘생산 운영 플랫폼’입니다. 생성형 AI 기반 분석 기능을 적용해 병목 구간, 작업 지연 요인, 안전 리스크를 사전에 식별하는 예측형 운영 체계로 확장할 계획이며, 공정 변경이 생산성에 미칠 영향을 사전에 검토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 기반 환경 구축도 함께 추진하고 있습니다.
삼성중공업은 로봇·AI 협업 공정도 본격 확대하고 있습니다. 지난 9월부터 24시간 운영 체제로 전환된 형강절단로봇 시스템은 로봇 터치센싱 기술과 시뮬레이션 테스트를 통해 기존보다 높은 수준의 품질을 확보했습니다. 지난달에는 레인보우로보틱스와 ‘조선용 로봇 개발 및 사업화를 위한 MOU’를 체결하며 협동로봇, 이동형 양팔로봇, 4족로봇 기반의 ‘AI 탑재 용접로봇’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기존 로봇 작업이 어려웠던 곡(曲) 블록 용접에 투입돼 생산성 향상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최성안 삼성중공업 부회장 겸 대표이사가 지난달 29일 삼성거제호텔에서 열린 ‘오토투비전(Auto2Vision)’ 행사에서 설계·생산 자동화 비전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삼성중공업)
디지털 전환의 종착점, 가상 조선소
삼성중공업은 생산 공정의 디지털화를 넘어, 설계·생산 데이터를 가상공간에서 통합적으로 검증하는 ‘가상 조선소’ 구축에도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지난달 삼성전자와 XR(확장현실) 기술 협력 MOU를 체결하며 실제 조선소 데이터를 XR 환경에서 설계 검증, 작업 점검, 교육, 검사로 연계하는 체계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가상 조선소는 공정 간섭, 배관 충돌, 구조 오류처럼 실제 현장에서 수정이 까다로운 문제를 사전에 검증할 수 있는 플랫폼입니다. LNG 운반선의 엔진 시스템을 3D 모델로 구현해 패스스루와 핸드트래킹 기능을 활용해 세부 구조를 점검할 수 있습니다. S-EDP와 SYARD에 축적된 데이터를 3D로 시각화해 조립 순서와 위험 요소를 명확히 분석할 수 있으며, 해외 선주들도 동일한 모델을 XR 환경에서 검토할 수 있어 설계·품질 협업 방식이 한층 효율적으로 바뀝니다. 기존 VR 기반 안전·직무 교육을 넘어 시운전·정비·비상 대응 훈련까지 XR로 확장해 현장 대응력을 높일 계획입니다.
삼성중공업은 선박 인도 이후에도 데이터를 지속적으로 수집합니다. 자체 개발한 에스베슬(SVESSEL), 에스비전(SVISION), SCBM 기술로 운항 중 선박의 장비 상태와 에너지 효율을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이 데이터는 다시 S-EDP와 SYARD로 환류돼 다음 선박의 설계 기준과 생산 조건을 개선하는 근거로 활용됩니다.
삼성중공업은 “향후에도 디지털 솔루션을 통해 선박의 수명, 내구성과 에너지 효율뿐 아니라 경제성과 안정성까지 제고하고자 한다”며 “미래형 조선소 구축을 위한 기술개발을 전·후방 산업과 연계해 조선해양 산업의 패러다임 전환을 선도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윤영혜 기자 yyh@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