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기획2050)②촛불혁명, 주권자 민주주의로 500년 정치 패러다임 바꾸다

입력 : 2018-08-20 오전 7:00:00
오늘날 한국에서 20세기형 정당 정치는 지속가능할까. 대답은 단호히 '노(No)'다. 2016년 촛불혁명 이후 한국 정치는 새로운 세상으로 가버렸다. 우리는 촛불혁명을 통해 영국 명예혁명과 청교도혁명, 미국 독립전쟁, 프랑스혁명 등 근대 시민혁명보다 더 엄청난 일을 겪었음에도 아직 그 거대한 파도를 못 느낀다. 지구가 엄청난 속도로 자전하지만 인간은 속도도, 소리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촛불혁명 이후 근대 민주주의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넘어 '나는 내가 스스로 대표한다'는 주권자 민주주의로 패러다임을 바꿨다.
 
21세기 세계 정치에서 가장 눈에 띈 변화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트위터 정치다. 그는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 등 제도권 언론에 의존하지 않는다. 김정은에 불만이 있더라도 백악관 성명을 발표하지 않는다. 대신 120자의 원색적 트윗을 쓴다. 스마트폰을 든 미국인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시민들은 곧바로 그의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트럼프의 발언에 냉소하기도 하지만 때론 대단하다는 생각도 한다. 트럼프는 중국과 무역전쟁을 벌일 때도 무역협상 테이블에 대표자를 보내기 전, 먼저 트위터에 자신의 입장부터 썼다. 세계 시민들은 그 메시지에 반응하고 언론은 뒤늦게 움직인다.
 
박근혜 국정농단 사태를 계기로 2016년 10월29일부터 2017년 3월11일까지 20차례의 촛불집회가 서울 광화문광장과 전국에서 열렸다. 사진/뉴시스

21세기형 정치…제도권 정치와 언론 공생관계 무너져
 
격세지감이다. 트럼프의 여론 정치는 20세기 정치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20세기 정치 메시지 전략의 백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노변정담'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루스벨트는 치열한 전쟁 상황을 딱딱하고 공식적인 브리핑으로 발표하지 않았다. 대신 저녁 무렵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는 가운데 마치 친구가 이야기해주는 것처럼 조곤조곤 설명했다. 그의 목소리는 전파를 타고 미국 전역에 퍼져나갔고, 미국 정치와 여론을 주도했다. 프랑스의 샤를 드골이 보여준 '자유 프랑스' 방송도 한 사례다. 2차 대전 당시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 점령당했고 독일의 꼭두각시인 비시정부가 등장했다. 도버 해협 건너에서 프랑스 망명정부를 이끌던 드골은 라디오를 통해 독일과 결사항전을 외쳤다. 프랑스 국민들은 그의 말에 귀 기울이며 레지스탕스를 조직해 독일에 저항했다. 당시 그 존재조차 미미했던 드골은 자유 프랑스 방송을 통해 일약 유럽 정치의 중심에 섰다. 루스벨트와 드골은 20세기 정치 메시지 전략의 힘을 보여준다.
 
유심히 볼 것은 라디오라는 언론매체다. 루스벨트와 미국 국민, 드골과 프랑스 국민 사이에는 라디오가 있었다. 정치 지도자와 시민 사이에는 어떤 형태든 거대 자본에 기반한 언론매체가 중간자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중간자는 그냥 전달자에 머무르지 않고 권력화됐다. 이들은 여론을 형성하고 자기 주장을 여론에 집어넣기도 한다. 이것이 20세기 정치 메시지의 생산과 공급사슬이었다. 한국 정치에서도 언론의 영향력이 막강했다. 보수언론이라는 조·중·동은 물론 진보매체들의 발언권도 상당했다. 보수언론은 여론 형성의 영향력을 무기로 현실 정치에서도 큰 힘을 발휘하며 권력기관처럼 됐다. 그런데 20세기형 여론 공급사슬을 가장 치명적으로 해체한 정치인이 나타났으니, 그는 역설적이게도 극우 보수성향의 트럼프다. 그는 미국 여론을 주도하는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와의 싸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버락 오바마 등 기존 정치인들은 감히 시도도 못 했던 일이다. 반면 트럼프는 트위터를 통해 새로운 정치실험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의 정치노선에 동의할 수는 없더라도 미디어 정치에서만큼은 그가 가장 첨단적이고 혁신적이다.
 
사진/뉴스토마토
한국의 여론 형성과정도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활성화되면서 급변하고 있다. 정치인들은 이슈에 대한 생각을 SNS에 올린다. 사람들은 실시간으로 그 글을 읽는다. 격세지감이다. 10년 전만 해도 정치인이 국민에 알릴 쟁점이 있다면 직접 브리핑을 했다. 원고는 언론사에 보내졌고 기사로 만들어져 각 가정에 신문으로 배달했다. 시민들은 새벽에 온 신문을 보고 뉴스와 여론을 확인했다. 그나마 이렇게 기사로 실리는 것은 유력 정치인의 경우에야 가능했다. 뉴스에 안 다뤄지는 정치인이 더 많았다. 오죽하면 정치인은 나쁜 뉴스라도 언론에 나오는 게 중요하다고 했을까. 그래서 언론은 권력이 됐다. 기사에 더 실리기 위해 정치인은 기자들에게 밥을 사주고 관리하는 데 공을 쏟았다. 지금은 상황이 나아졌다지만 정치인과 언론의 본질적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엘리트형 정당구조에서 직접 민주주의로 전환
 
20세기 정치의 다른 축은 근대 정당구조다. 20세기 유럽에서는 노동계급이 정치로 진출하면서 사회민주주의나 노동당이 등장했다. 보수기득권의 독점을 깨고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한다며 진보정당이 만들어졌으나 그들도 소수 엘리트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 독일의 사민당은 보수기득권에 대항하려면 '조직화된 노동계급의 힘'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래서 정당 사무국 중심의 정당 관료제를 도입하고 조직화된 힘을 키우고자 했지만, 정당 관료제 자체가 보수화돼 버렸다. 로베르트 미헬스는 이를 '과두제의 철칙(Iron Law of Oligarchy)'이라며 절망했다. 한국 정당은 독일의 정당구조를 베꼈다. 5·16군사정변 이후 김종필은 민주공화당을 설계할 때 정치적 보수성에도 불구하고 독일 사민당 모델을 차용했다. 정당 사무국과 정당 관료제를 만들었고, 사무국을 관장하는 사무총장은 공천 과정에서 당수의 명을 받아 조직폭력배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민주공화당 이래 한국의 보수·진보정당들은 모두 이 뼈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촛불혁명은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정치 패러다임을 주권자 민주주의로 바꾸고 있다. 촛불혁명 당시 광장에서는 "이게 나라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은 근대 민주주의 패러다임이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주권자 민주주의로 진화한 순간이었다. 한국의 좁은 시야로는 이를 4·19혁명, 5월 광주, 87년 민주화로 이어지는 맥락으로만 이해한다. 하지만 촛불혁명은 국내적 시각을 뛰어넘는, 근대 정치의 패러다임을 바꾼 문명사적 사건이다. 촛불혁명은 16세기 피렌체에서 발화한 시민적 공화주의, 17~18세기 영국과 미국, 프랑스 등 대서양 양안의 시민혁명에 이어 세 번째로 등장한 민주주의 패러다임의 변화다.
 
구체적으로 보면, 촛불혁명은 프랑스혁명 등 시민혁명보다 피렌체 도시공화정에서 일어난 직접 민주주의에 훨씬 가깝다. 당시 피렌체에는 10만명의 인구가 살았다. 공방에서 일하던 장인들은 일과를 마치고 한시간 남짓 걸어서 도시 중앙광장까지 나왔다. 저녁에 친구들과 식사를 하면서 피렌체의 정치와 유럽의 각종 이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자연스레 시민적 공론이 중앙광장에서 모여졌다. 시민들의 하루 일상이 광장이라는 공간에 그대로 투영, '일상 민주주의(Everyday Democracy)'가 실현됐다. 이는 촛불혁명과 닮았다. 촛불혁명도 일주일에 한 번씩 전국 곳곳의 시민들이 광화문광장이나 지역의 중앙광장에 모였다. 공론은 광장은 물론 주변의 카페나 식당, SNS를 통해 일상적으로 번져갔다. 10만명이 사는 도시에서나 가능했던 직접 민주주의를 전철·버스라는 교통수단과 스마트폰이라는 통신수단이 인구 5000만명의 대한민국에서 그대로 구현했다.
 
1789년 7월4일 프랑스 파리 민중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프랑스혁명이 시작됐다. 당시 모습을 그린 장 피에르 우엘의 <바스티유 습격>
 
촛불혁명, 500년 패러다임 깬 문명사적 전환
 
형식적 변화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내용의 변화다. 피렌체 도시공화정의 직접 민주주의는 근대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대의제 민주주의로 바뀌었는데, 직접적 이유는 물리적 시·공간의 제약 때문이다. 미국은 독립 당시 13개주의 모든 시민들이 마차를 타고 필라델피아로 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시민의 대표가 의회에 모이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의제 민주주의의 더 큰 쟁점은 시민의 대표가 '권한을 대리하느냐 위임받느냐' 하는 문제였다. 거슬러가면 이 논쟁은 로마 공화정 때도 등장한다. 근대 엘리트들은 민중을 불신했고, 시민의 대표가 시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국회의원이 지역의 민의와 다른 결정을 할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는 피렌체 도시공화정과 근대 시민혁명을 거치며 오늘까지도 민주주의의 금과옥조로 간주됐다.
 
촛불혁명은 500년간 철옹성처럼 버틴 '시민의 대표는 대리하는 게 아니라 위임받았다'는 근대 대의제 민주주의의 명제에 근본적 반성과 성찰을 던지고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는 선거로 뽑은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민의를 수렴해 정치에 잘 반영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박근혜 국정농단 사태를 계기로 정치인들이 권력을 공익이 아닌 사익을 위해 남용했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시민들은 더이상 고양이에게 생선를 맡기듯 권력을 위임하지 않아야 한다고 깨달았다. 그들은 권력의 일부를 직접 회수했고, 이제 권력은 국회와 청와대에만 머물지 않게 됐다. 한국 정치는 제도권 정치와 광장 정치라는 이중 권력구조로 진화했다. 직접 민주주의와 간접 민주주의를 혼합한 새로운 정치가 이뤄지고 있다. 광화문 1번가와 청와대 국민청원은 새 정치의 구체적 제도들이다.
 
주권자 민주주의의 방점은 직접 민주주의와 간접 민주주의의 혼합형이라는 데만 있지 않다. '내가 나를 대표한다'게 핵심이다. 주권자 민주주의는 일방적으로 권한을 위임하는 일은 그만두겠다는 선언이다. 주권자 민주주의가 도시공화정의 직접 민주주의, 시민혁명의 대의제 민주주의에 이은 문명사적 전환으로 평가받아야 할 이유다. SNS를 통한 트럼프식 트위터 정치는 새로운 정치의 장을 열었다. 국민을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는 의회와 이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언론은 정치적 기제로서 역할이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트럼프식 정치보다, SNS를 통한 정치보다 더 근본적인 문명사적 전환이 진행 중이다. 촛불혁명과 주권자 민주주의는 정치 패러다임을 근본부터 바꾸고 있다.

임채원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원 교수
 
 
* 필자 소개 : 필자는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원 교수다. 서울대 종교학과 졸업 후 동대학원 행정학 석·박사를 수료하고 동대학 한국행정연구소와 국가리더십센터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했다. 경희대에서는 세계화와 사회정책 등 글로벌 어젠다와 동아시아문명의 국정운영을 연구 중이다. 또 문재인정부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국무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 공공정책분과 위원장으로 국가 미래전략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30년 후의 국가비전을 모색하는 이번 기획은 격주로 총 15회로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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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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