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재영 선임기자] 지배주주라는 이유로 미등기 임원임에도 고액 보수를 받는 명예회장이 여전히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지배주주에게 보수를 몰아줘 다른 주주들의 배당권리가 침해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이사들이 '오너'에게만 충실 의무를 지는 현 상법의 문제점이 또다시 드러난 사례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명예회장들의 '돈잔치'로 인해 이사들의 충실 의무를 일반 주주까지 확대하자는 상법 개정의 당위성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DB그룹 외에도 고려아연까지
9일 <뉴스토마토>가 기업집단 상장사(유가증권시장) 내 명예회장 보수를 확인한 결과, 지난해 사업보고서를 통해 공시한 업체들 가운데 명예회장에게 개인 보수로 5억원 이상을 지급한 기업이 DB하이텍을 비롯해 고려아연, 이마트, 동방, 삼천리 등 5곳이나 됐습니다.
지난달 31일, 경제개혁연대는 DB그룹 자회사인 DB하이텍이 김준기 전 DB그룹 회장에게 '창업회장'이라는 생소한 명목으로 과다한 보수를 지급했다며 이를 문제삼기도 했습니다. 실제 김 전 회장이 2023년에 받은 34억원이라는 보수는, 같은 시기 DB하이텍 등기이사 및 감사들이 받은 보수(평균 2억1000여만원)보다 16배 이상 많았습니다. 김 전 회장은 과거 성범죄 혐의로 집행유예가 확정돼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바 있습니다.
경제개혁연대는 김 전 회장의 장남인 김남호 회장 역시 미등기임원으로서 과도한 보수를 받는다고 지적했습니다. 부자가 2023년까지 3년간 지급받은 보수는 총 179억원으로 등기이사 총보수 59억원에 비해 3배나 많습니다. 경제개혁연대는 “김준기와 김남호 부자의 보수는 같은 기간 DB하이텍 주주들에게 지급한 총배당금 1003억원 대비 17.9%, 일반주주에게 지급된 배당금 821억원 대비 21.8%에 달한다”며 “현저히 과도한 보수는 일반주주 배당으로 돌아가야 할 회사 이익을 자신에게 특별배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또 경제개혁연대는 법인의 임원에게 지급한 보수 또는 퇴직금이 과도할 경우 상법 제382조의3 이사 충실의무를 위반했다고 본 대법원 판례를 들어 이달 말까지 회사가 경영진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라고 촉구했습니다. 만약 소송을 제기하지 않으면 주주대표소송을 벌인다는 계획입니다.
경영권 분쟁이 한창인 고려아연에서도 명예회장 보수가 눈에 띕니다. 2023년에만 최창걸 명예회장이 24억원, 최창영 명예회장이 22억2000여만원 받았습니다. 이사·감사 평균 보수가 4억3000여만원인데, 미등기임원으로 그보다 5배 이상 많은 보수를 받은 것입니다. 고려아연은 오는 23일 경영권 분쟁 분수령인 임시주총을 앞두고 있습니다. 사모펀드 관행을 문제 삼아 영풍과 MBK파트너스보다, 고려아연 최윤범 회장 측을 지지하라는 의결권 자문도 나왔는데요. 유상증자 불공정거래 혐의로 검찰 고발까지 이어지는 등 현 경영진도 책임이 불거져 있습니다. 주총을 앞두고 비방전이 치열합니다.
이마트는 정재은 명예회장(미등기)이 30억6000여만원으로 이사·감사 평균 보수 14억5000여만원보다 2.1배 많은 보수를 받았습니다. 정용진 총괄부회장이 받은 36억9000여만원과도 차이가 크지 않았습니다. 정 명예회장은 신세계 미등기임원에도 올라 있으나 5억 이상 보수 수령자에선 빠졌습니다. 동방에선 김용대 명예회장(미등기)이 8억6000여만원을 받아, 이사·감사 평균 보수(2억3000여만원)보다 3.7배 많았습니다. 삼천리 이만득 명예회장(미등기)도 11억7000여만원으로 이사·감사(2억5000여만원)보다 4.7배 많은 보수를 챙겼습니다.
상법 개정과 주주대표소송 얽혀
기업집단 지배주주의 고액 보수는 상법과 얽혀 있습니다. 상법 제388조는 이사 보수를 주총 결의로 정하도록 하고 있는데요. 실무적으로는 주총에서 보수총액만 정합니다. 이 때문에 임원과 직원 간 보수 차이가 과도하게 벌어지곤 합니다. 게다가 미등기임원 총수일가는 등기임원보다 많은 보수를 수령해 문제시 됩니다. 일각에선 이런 게 일종의 사익편취라고 보고 상법상 이사충실의무를 강화해 해소하자고 합니다.
아울러 주주 보호를 위한 대표적 사후 수단으로 주주대표소송이 꼽힙니다. 재계는 상법 개정 시 소송 남발을 우려하지만, 소송에서 승소해도 원고 측에 보상이 주어지지 않고 손해배상금이 회사에 귀속되기 때문에 소송이 남발할 가능성은 많지 않습니다. 달리 말하면 소송 유인책이 없어 상법을 개정해도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상법 충실의무가 강화되면 사전적으로 이사들이 주주 이익을 비례적으로 대표해야 한다는 압박과 유인을 받게 된다”며 “따라서 총수일가 사익편취에 영합해 이사 재선임될 유인을 스스로 교정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박 교수는 또 “사후적 소송을 통한 이사 행위에 대한 교정은 다소 회의적”이라며 “원고가 피고의 잘못된 행위를 입증하기 위한 (디스커버리 제도 없이) 증거 수집이 어렵고 승소해도 그 이익이 주주들에게 귀속되지 않아 주주대표소송이 활성화될지 의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재영 선임기자 leealiv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