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숨소리)임진강의 파수꾼, 시간을 파수하는 재두루미

입력 : 2026-01-08 오후 4:14:02
 
재두루미 한 마리가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핀다. 모두의 안녕을 위한 새벽의 파수는 꼭 필요하다.
 
새벽의 끄트머리, 채 가시지 않은 적막한 어둠을 무거운 강바람이 휘휘 휘저을 때 재두루미(Antigone vipio, White-naped Crane) 한 마리가 무리에서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핍니다. 임진강 하류의 어느 둔턱, 철책과 논이 이어지고 뉘엿뉘엿 초소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이는 곳, 무리를 지키기 위해 보초를 서며 살뜰히 주변을 살피는 한 마리의 재두루미는 어느 소설 제목을 떠오르게 합니다. 슬쩍 장소를 바꿔 불러봅니다.
 
임진강의 파수꾼. 한 마리 재두루미의 역할은 무리의 생존을 위해 매우 중요합니다. 어둠이 짙게 깔리는 밤과 새벽은 무리가 가장 취약한 시간이자 스스로도 가장 취약한 시간입니다. 삵과 같은 천적들에게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무리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졸음을 꾸역꾸역 참아가면서 꼿꼿하게 고개를 세우고 밤을 샙니다. 그 한 마리의 파수 덕분에 재두루미 무리는 마음 편하게 깊은 밤, 깊은 잠을 청할 수 있지요. 그렇게 아침 해가 솟고 무리의 재두루미들도 감은 눈을 뜰 때, 뜬눈으로 무리를 지킨 임진강의 파수꾼은 무리 속으로 사라집니다.
 
재두루미 무리, 그 곁에는 오리나 기러기 무리도 있습니다. 아침이 밝아오면 흰꼬리수리가 날아와 입맛을 다십니다. 이에 그 흰꼬리수리의 먹잇감이 되지 않기 위해 오리나 기러기 무리는 한데 강가를 가르며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그 요란한 사이에 재두루미 무리는 목청을 풀기 시작합니다. 이내 마치 트럼펫을 부는 듯한 소리가 강가에 울려 퍼집니다. 밤의 파수가 끝나고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무리의 그 아름다운 소리, 들어보신 적 있나요?
 
"뚜루-뚜루뚜, 뚜루루-뚜루루루-"
 
이 소리의 주인공, 재두루미는 가슴에서 날개 끝으로 번지는 은빛 명암, 흰 목, 그리고 붉은 뺨이 특징입니다. 한국에서는 몸 빛깔이 잿빛을 띠기 때문에 재두루미라고 부릅니다. 영어로는 목덜미가 하얗기 때문에 흰목두루미(White-nape Crane)라고 불리지요. 임진강변에서 밤을 보낸 재두루미 무리는 긴 목을 날개 품에 접어 넣고 서로 몸을 기대어 서 있는데, 은빛의 형상이 천천히 숨을 고르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재두루미 무리는 이렇게 한데 모여 있다가도 일단 날아오르면 가족 단위로 흩어져 먹이터로 향합니다. 날기 직전에는 목을 앞으로 길게 뻗고, 두세 걸음 내딛으며 날갯짓합니다. 그리고 내려앉은 논에서는 낙곡을 한 톨, 두 톨, 참 야무지게도 찾아냅니다.
 
재두루미 한 쌍이 서로 구애의 춤을 추고 있다.
 
재두루미가 봄부터 여름까지 있는 곳은 러시아 동부 아무르강 유역과 몽골 동부의 광활한 습지입니다. 그곳에서 짝을 이루고 어린 새를 기른 뒤, 가을이 오면 남쪽으로의 긴 여행을 시작합니다. 북쪽의 매서운 겨울을 피해 먹이를 비교적 잘 구할 수 있는 따뜻한 곳을 찾아서입니다. 그렇게 훨훨 날아 도착하는 곳은 한국의 철원과 연천, 한강 하구, 창원 주남저수지 등입니다. 일부는 일본 이즈미까지 날아갑니다.
 
환경부가 1999년부터 실시한 '겨울철 야생조류 동시 센서스'에 따르면, 1999년 당시 재두루미가 철원에 474마리가 찾아왔습니다. 2024년에 한국에 찾아온 개체수가 최대 9500마리였다고 하니, 지난 20여년간 그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난 셈입니다. 개체수가 늘어난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마냥 기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만큼 다른 월동지에 어려움이 있어 철원, 파주와 같은 특정 지역으로 더 많이 모이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재두루미가 한반도, 특히 비무장지대 일대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역설적이게도 이곳은 한국전쟁 이후 70여년 동안 사람의 출입과 개발이 제한되며 재두루미와 같은 특정 종들에게는 비교적 안전한 겨울 보금자리가 됐습니다. 넓은 농경지가 있고, 물이 머무는 습지가 있고, 밤을 보낼 잠자리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재두루미 입장에서 사람 종의 접근이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주변 변화에 예민한 두루미류의 습성에 알맞는 장소였던 것이지요.
 
해질 무렵이면 재두루미들은 다시 강가로 돌아옵니다. 낮 동안 논과 습지로 흩어졌던 재두루미 가족들이 하나둘, 삼삼오오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안녕을 확인하듯 합창을 시작합니다. "뚜루뚜, 뚜루루루루-"
 
그 소리가 옅어질수록 어둠은 짙어지고, 강가에 다시 밤이 오고, 한 마리의 재두루미가 파수를 시작합니다. 꾸역꾸역 졸음을 참을지, 부릅뜬 눈으로 주변을 둘러볼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점은 오늘도 어느 한 마리 재두루미가 밤과 무리를 지킨다는 것이지요. 한 마리의 재두루미가 뜬눈으로 지켜준 시간으로부터, 어느 하나로서 무리를 돌보고, 또 다른 재두루미들을 지키고 돌고 돌아 다시 스스로를 지키는 시간의 파수랄까요. 임진강의 파수꾼이자 시간을 파수하는 어느 재두루미 무리로부터 나의 오늘을 지켜준 존재들을 생각하며, 또 내가 지켜야 할 존재들 역시 떠올리며 이 글을 띄웁니다.
글·사진= 김용재 생태칼럼리스트 K-wil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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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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