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기성·곽보연기자] 기업들의 해외 진출 바람이 예사롭지 않다. 대내외 경기 불확실성이 증대되면서 올 상반기 10대 그룹의 총 투자액이 전년 동기 대비 8.2%(3조2179억원) 줄어든 가운데, 이마저 해외에 집중돼 국내 기대 효과는 반감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강성 노조로 노동 유연성이 무너지고, 경제민주화에 기댄 각종 규제들마저 쏟아지자 더 이상 국내에서 경영하기가 어렵다는 게 기업들의 공통된 하소연이다. 전임 정부에서 비즈니스 프렌들리 기조 하에 각종 수혜를 받다 경제민주화에 봉착하다 보니 내심 불만도 커졌다.
특히 대기업의 경우 대부분의 매출을 수출을 통해 올리다 보니 현지화 차원에서도 생산거점의 필요성은 커졌다는 분석이다. 여기에다 각 국들이 경쟁하듯 세제 혜택과 부지 제공 등을 얹어 해외자본 유치에 나선 터라 쌓인 유보금을 풀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 조성됐다.
중국과 동남아의 경우 시장 규모 및 성장 가능성, 풍부한 노동력에, 싼 인건비는 덤이다.
이를 반영하듯 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해외공장을 운영 중인 제조업체 700개사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 기업의 무려 78%가 해외의 경영여건이 국내보다 낫다고 답했다.
특히 이들 중 해외공장을 국내로 옮길 의사가 있는지에 대해 단 1.5%만이 긍정적 의향을 내비쳤다. 인건비 부담과 경직적 노사관계가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목됐다.
동시에 정부와 재계가 한목소리로 주장하던 낙수효과는 또 다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재벌들의 대규모 투자 집행을 통한 설비 등 관련 산업의 발전과 이로 인한 고용 창출, 가계소득 증대, 소비 진작이라는 선순환의 첫 출발점이 삐걱대고 있기 때문이다. 내수의 장기침체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자영업자들에겐 악몽과도 같다.
◇전차군단, 해외투자도 '주도'..국내는 울상
현대차가 고질병인 노조 파업에 신음하는 사이, 미국 조지아주와 앨라배마주는 현대차와 기아차 공장 증설 유치전에 뛰어들었다. 네이선 딜 조지아 주지사는 지난 21일 우리나라를 비공식 방문해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을 만나는 등 적극적인 구애 공세를 펴기도 했다. 현대다이모스는 조지아주 기아차 북미공장 인근 부지에 최대 3500만달러를 투입해 2년 안에 부품공장과 관련시설을 세우기로 확정했다.
현대차그룹은 직접적 언급을 아끼고 있지만 재계는 이를 노조에 대한 반격의 빌미로 삼는 분위기다. 현재 현대차와 기아차 노조가 벌이고 있는 부분 파업에 따른 피해 규모를 반복, 강조해가며 강성 노조로 인해 생산시설이 해외로 빠르게 이전될 수 있다고 압박하는 모양새다.
실제 이유는 '현지화 전략'임에도, 이참에 노조에 대한 비난 여론을 고조시키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게 노조 측 반론이다.
현대차는 앞서 지난해 브라질 공장을 신설하고, 중국 쓰촨에 상용차 합작공장을 짓는 등 해외 거점 마련에 분주하다. 현재 미국, 중국, 인도, 터키, 체코, 러시아, 브라질 등 7개국에 총 10개의 해외공장을 두고 있으며, 해외생산 비중은 지난해 56%에서 올 상반기 61%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5곳의 해외공장을 두고 있는 기아차는 현재 중국 4공장 건설을 추진 중이다.
◇현대차가 지난해 브라질에 준공한 자동차 생산공장의 모습.(사진제공=현대차)
해외 거점 건설이 활발해지면서 기아차를 포함한 현대차그룹의 해외생산 비중은 해마다 꾸준히 늘었다. 2010년 45.2%에서 2011년 47.5%, 2012년 51%로 해외 쏠림 현상이 가속화됐다. 지난해(국내 49%·해외 51%)와 비교해서도 올 상반기 국내생산 비중은 45.7%로 떨어진 반면, 해외생산 비중은 54.3%로 뛰어올랐다. 현대·기아차의 해외공장이 예정대로 완공되면 내년에는 해외생산 비중이 60%에 육박할 전망이다.
시가총액 1위인 삼성전자의 경우도 마찬가지. 삼성전자는 지난달 2분기 실적 발표와 함께 “올해 사상 최대인 24조원을 생산 설비에 투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사상 최대치였던 지난해 투자(22조8500억원)보다 1조원 이상 늘어난 규모다. 이건희 회장이 박근혜 대통령을 만난 직후 쏟아낸 일련의 조치여서, 투자확대를 요구한 정부에 대한 화답으로 받아들여졌다.
구체적으로는 13조원이 투입되는 반도체를 중심으로 디스플레이와 휴대전화 등에 투자가 집중된다. 26일 CEO스코어에 따르면 삼성전자 상반기 투자액은 전년 동기 대비 4조8629억원 줄어든 9조원에 그친 만큼 하반기에 투자가 집중될 전망이다.
삼성전자가 보수적 입장을 접고 공격적 투자에 나서면서 관련 산업의 기대치가 한껏 높아졌지만 투자 집행에 따른 실제 효과는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공장 증설 등 대규모 투자가 해외에 집중되는 만큼 국내의 경우 장비 대체 및 설비 유지·보수 수준에 머무를 것으로 보인다.
실제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 70억달러를 투자해 플래시 메모리 공장을 건설 중에 있으며, 30억달러를 들여 상하이 인근 쑤저우에 짓고 있는 대규모 LCD 공장도 신설을 눈앞에 두고 있다.
여기에다 40억달러를 투입해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 공장의 플래시 메모리 생산라인을 스마트폰용 연산장치 생산라인으로 바꾸는 작업을 진행 중에 있다. 베트남 옌퐁공단에도 10억달러를 추가로 투입해 휴대전화 공장 증설에 돌입했다.
대략 합쳐도 총 150억달러, 우리 돈으로 16조6500억원에 달한다. 반면 국내에서는 화성의 반도체 17라인 신설 외에는 뚜렷한 설비 투자처를 찾기 어렵다. 여기에 투입되는 자금은 2조2500억원으로, 앞선 해외투자 규모에 비하면 7.4%에 불과하다.
이외 기존 설비에 대한 유지와 보수가 집행되지만 공장 신·증설에 비하면 그 효과는 상대적으로 미미하다는 게 전문가들 분석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9월 중국 시안시에 차세대 낸드플래시 메모리반도체 생산라인 건설을 시작했다. 이 공장 건설을 위해 70억달러가 투자됐다.(사진제공=삼성전자)
◇포스코·동국제강·한국타이어 등 대열 합류..낙수효과 '전무'
포스코강판은 최근 창사 이래 첫 해외공장을 미얀마에 설립하기로 내부 방침을 정하고, 현재 미얀마 정부와 막바지 협상을 진행 중에 있다. 동국제강도 국내 제철사 가운데 처음으로 브라질에 연산 300만t 규모의 고로제철소를 짓고 있다. 세계 최대 철광석 공급사인 브라질의 발레와 세계 최고 수준의 고로 제철 기술을 가진 포스코와 합작해 진행 중이다. 지난해 7월 첫 삽을 떴으며, 2015년 하반기를 완공 목표로 하고 있다.
롯데케미칼은 총 사업비 39억2000만달러를 들여 한국가스공사, STX에너지 등과 함께 우즈베키스탄 수르길 지역에 가스전을 기반으로 한 석유화학공장을 짓고 있다. 이밖에 한국타이어는 북미 생산 공장 건설을 놓고 기아차 공장이 있는 미국 조지아주와 BMW 공장이 있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를 놓고 최종 저울질에 들어갔다.
대외적으로 드러난 계획 외에 실제 기업 내부에서 추진 중인 해외 이전 및 해외 공장 신·증설 계획까지 더할 경우 그 규모는 상당할 정도로 추산된다. “총수 리스크에 옴짝달싹 못 하는 몇몇 기업들을 빼고는 시간문제일 뿐, 이미 계획단계를 넘어 추진 중인 곳도 상당수에 달한다”는 게 재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전언이다.
문제는 이들 기업이 해외로 눈을 돌리면서 고용 등 국내경제에 기대됐던 효과가 사실상 전무한 실정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특히 이들은 이익을 좇아 해외로 터를 옮기고 있음에도 마치 경제민주화를 비롯한 정치권의 규제 강화 때문인 것처럼 내세우며 예봉을 무력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투자'가 만병통치약이 돼 때로는 압력수단으로, 때로는 반대급부로 제시되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다.
삼성전자의 경우 지난 2005년 국내 직원이 8만600명에서 2011년 10만1973명으로 26.5% 증가하는 사이, 같은 기간 해외 직원은 5만7500명에서 11만9753명으로 무려 108% 급증했다. 지난해에는 해외 고용이 2만5000명 늘어 전체 인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60%를 넘어선 반면 국내 고용은 제자리걸음이었다.
현대차 역시 2005년부터 2011년까지 6년간 국내 임직원이 5만4440명에서 5만7303명으로 5% 늘어난 반면, 해외 임직원은 1만7210명에서 2만9천125명으로 69.2% 뛰었다. 기업들이 하나같이 경제민주화 칼날을 세운 정치권에 규제 완화를 요구하며, 투자 활성화에 따른 부가 효과로 고용 창출, 관련 산업 부양, 내수 회복을 거론한 근거가 실상은 백지임을 여실히 증명한 셈이다.
이에 대해 위평량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은 “기업은 기본적으로 낮은 비용으로 많은 이익을 낼 수 있는 시장을 찾아서 간다”며 “이것을 경제민주화나 제도 개선의 영향 때문에 해외로 나간다고 하는 (기업)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