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기성기자] 묘수다. 동시에 파격이다. 구상은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나온 듯 보인다.
24일 재계는 이른 아침부터 술렁이기 시작했다. 화두는 전날 있었던 제일모직의 패션사업 이양이었다. 사명에서 알 수 있듯 제일모직의 모태인 모직을 과감히 떼어 버렸다. 대신 에버랜드에 자리를 잡았다. 에버랜드는 삼성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 사실상의 지주사다. 때문에 이를 삼성 설명처럼 단순한 사업 조정으로 해석하는 이는 없다. 모두들 삼성그룹의 후계구도와 연관 지어 바라보고 있다.
삼성 측도 이를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삼성그룹 고위 관계자는 이날 기자에게 “외부 시각에 대해 뭐라 반론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로서는 매우 부담스럽지만 해석이 틀린 것도 아니다”고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 “인사는 나봐야 알지만, 현재로서는 연말 있을 사장단 인사에서 이서현 부사장의 역할 재조정이 있지 않겠느냐는 시선이 많다”고 내부 기류를 전했다. 이서현 부사장은 이건희 회장의 차녀로, 현재 제일모직과 제일기획 부사장이다.
또 다른 관계자는 보다 직접적이었다. 그는 이 부사장의 언니이자 이 회장의 장녀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의 예를 들었다. 이 관계자는 “이부진 사장도 호텔신라를 맡으면서 에버랜드 (경영전략 담당) 사장을 겸임하고 있다”며 “선례도 있는 만큼 이서현 부사장이 제일기획을 책임지면서 에버랜드로 자리를 옮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부사장의 경우 패션을 떼놓고 생각하기 어려운 만큼 가능한 구상”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연말 인사에 앞서 사전정지 작업을 행한 것이란 설명이다.
이 부사장은 미국 파슨스디자인학교를 졸업, 2002년 제일모직에 입사해 패션 사업을 이끌어 왔다. 그의 옷차림 하나하나가 뉴스가 될 정도로 패션 분야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기도 했다. 때문에 패션을 떼어낸 제일모직에 이 부사장을 묶어두기 보다 패션 사업이 이관된 에버랜드로 자리를 옮겨 전공을 살리는 게 아무래도 상식적이란 분석이다. 이는 동시에 ‘이부진=호텔신라+에버랜드’, ‘이서현=제일모직+제일기획’이란 기존 승계 등식을 깨는 파격이기도 하다.
◇왼쪽부터 이건희 회장의 장남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차녀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에버랜드 사장.(사진=뉴스토마토 DB)
결과에 맞닥뜨리자 놓쳐버렸던 복선도 다시 부각됐다. 올 초 삼성전자 DMC 부문 경영지원실장 겸 전사 경영지원실장(CFO)을 맡고 있던 윤주화 사장은 제일모직 패션사업 총괄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바 있다. 재무통인 그를 통해 제일모직 패션사업을 구조조정하기 위함이었다는 게 현재의 중론이다. 실제 제일모직은 사명과는 달리 이미 소재·부품 기업으로 변신한 상태다. 올 상반기 매출(3조1500억원) 가운데 패션 부문 비중은 단 30%이고, 소재·부품 부문이 70%에 달한다. 특히 패션 부문 영업이익률은 2%로, 소재·부품 부문(10%)에 비해 수익성도 크게 떨어진다.
이에 대해 삼성그룹 관계자는 “제일모직은 사실상의 전자 준계열사로 봐야 한다”며 “이제 전자 계열사로 완전히 편입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 경우 제일모직은 이 회장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품으로 들어가게 된다. 제일모직이 최근 노바엘이디 등 OLED에 특화된 해외기업들을 차례로 인수합병하며 핵심소재 기업으로의 행보를 가속화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이로써 삼성전자는 수직 계열화가 한층 다져지게 됐다.
동시에 에버랜드에 이부진·서현 자매가 포진하게 될 경우 이재용 부회장을 정점으로 한 세 남매의 협업 체제는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에버랜드는 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로 이어지는 환상형 순환출자구조의 정점에 위치해 있다. 이 부회장이 지분 25.10%를 보유, 최대 주주로 등재돼 있으며 이부진 사장과 이서현 부사장이 각각 8.37%의 지분을 동등하게 갖고 있다.
재계에서는 이건희 회장이 이부진 사장에다 이서현 부사장까지 에버랜드에 포진시킨 것을 두고 장남인 이재용 부회장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은연중에 내비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룹의 주인을 분명히 함과 동시에 향후 독립할 두 딸에게 역할과 한계를 분명히 인식케 했다는 분석에 무게가 실린다. 형제간 경영권 다툼을 지켜봤던 이 회장이다. ‘역시 이건희’란 말이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