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 반 페르시(Robin van Persie). (사진=로이터통신)
[뉴스토마토 이준혁기자] 나이만 먹었다고, 연차가 지났다고, 짧은 전성기에 잠깐 남보다 잘 했다고, 대중이 '베테랑'이란 수식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더불어 선수로 뛴 시간의 무게가 많이 무겁다고 주장 완장을 주는 것도 결코 아니다.
네덜란드의 주장인 로빈 반 페르시는 이 매우 평범한 진리이자 세상 순리를 새삼 일깨웠다. 어느새 30대가 됐고 '초반'을 지나 '중반'에 포함될 순간도 머지 않지만 네덜란드 축구 대표팀에서 그를 완벽하게 대체할 선수는 보이지 않는다.
이번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주장인 그의 맹활약은 시작부터 돋보였다. 더욱이 상대는 세계 최강 팀의 하나인 스페인. 하지만 그는 월드컵 대회 기록을 써낼 정도로 쌩쌩했다. 당연히 이날 경기 MOM(Man of the Match)은 그의 몫이 됐다.
◇32살의 반 페르시, 몸을 날린 활약으로 월드컵 최장거리 헤딩 골 기록
네덜란드는 14일 브라질 살바도르의 아레나 폰테 노바에서 열린 브라질월드컵 B조 1차전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선취점을 허용하고도 정확한 패스와 후반 폭발한 골 결정력 등을 앞세워 일방적 경기를 펼친끝에 5-1 역전승을 거뒀다.
이날 승리로 지난 2010년 열린 남아공 월드컵의 결승전에서 스페인에 패했던 네덜란드는 바로 다음 대회의 첫 대결를 통해 지난 통한의 결승전 패배의 설욕을 곧바로 이뤘다.
승리의 1등 공신은 단연 이날의 MOM으로 선정된 반 페르시다. 그는 네덜란드가 전반 27분 스페인의 선수 사비 아르소에게 페널티킥 선제골을 내주면서 경기를 어렵게 풀어가던 순간에 경기의 균형추를 되맞추는 동점골을 넣으며 득점의 시동을 걸었다.
왼쪽 후방에서 블린트가 최전방에 있던 반 페르시를 향해 패스를 날리자 그는 스페인의 오프사이드 트랩을 뚫고 카시야스 골피퍼가 있는 위치를 본 후 온몸을 날려 매우 환상적인 슛을 넣은 것이다. 전반 44분 나온 이 슛은 그의 A매치 44번째 골이다.
반 페르시의 헤딩 슛의 비거리는 17야드(15.5m)로 판명됐다. 미국 스포츠 전문 채널인 ESPN에 따르면 이 수치는 관련된 통계가 작성된 1970년 이후 월드컵 역사상 최장이다. 선수로서는 '노장(老將)'으로 불릴만한 32살 선수가 체력 기록을 새로 썼다.
반 페르시의 골로 엮인 좋은 분위기는 곧 전반전 종료의 휘슬이 울리면서 이어지기 어려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후반에 득점이 잇따라 이어져 대승을 거뒀다.
◇로빈 반 페르시(Robin van Persie). (사진=로이터통신)
◇팀의 동점골 이어 쐐기꼴까지, MOM은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반 페르시의 이날 네덜란드 첫 득점 이후로 동료들의 득점도 계속 이어졌다. 후반 8분 그와 함께 팀의 베테랑인 아르옌 로벤이, 후반 19분 팀의 샛별로 꼽히는 스테판 데 브라이가 한 차례씩 득점을 이뤘다. 팽팽하게 전개될 것으로 보였던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경기는 서서히 네덜란드가 경기의 주도권을 잡게 되는 방향으로 흘렀다.
그렇지만 세계 최강의 팀 중 하나로 꼽는 스페인의 추가득점이 언제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기도 했다. 산술적으로 약 9분에 한 골씩 넣고 추가 실점이 없다면 역전도 가능했다. 스페인은 그럴 능력이 있는 충분했다.
하지만 세 골차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스페인의 선수들이라도 압박감이 작을 수 없다. 결국 네덜란드는 점수 차이를 더욱 벌렸다. 선봉장은 반 페르시다.
반 페르시는 후반 27분 추가점을 잘 냈다. 이케르 카시야스 스페인 골키퍼가 트래핑 실수를 저지하자 반 페르시는 놓치지 않고서 골로 이은 것이다. 볼을 향한 집념과 득점을 향한 강한 목표 의식이 돋보이는 골이다.
상대가 카시야스이기에 반 페르시의 골은 더 돋보였다. 이번이 8번째 월드컵 출전인 카시야스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당시에 433분 무실점 기록을 세우며 대회를 마쳤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당시 왈테르 젱가(이탈리아)가 세운 517분의 최고 기록엔 85분이 남았다. 이번 경기와 다음 경기만 잘 막으면 기록 경신도 가능했다.
철벽 수문장이던 카시야스는 결국 반 페르시에게 한 골을 내주며 기록 경식 목전에 주저앉았다. 카시야스도 반 페르시의 환상적인 긴 헤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에게 동점골과 쐐기골로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던 반 페르시는 후반 34분 많은 관중들에게 큰 박수를 받으면서 레마인 레스와 교체됐다. 그라운드를 내려오면서 로벤에게 팀 주장 완장을 전한 반 페르시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고 좋은 결과를 써낸 사람이기에 누릴 수 있는 웃음이었다.
한편 네덜란드는 후반 35분 로벤이 다시 한 골을 보태며 이날 승리를 각인했고 마침내 5-1의 대승을 거뒀다. 이날 MOM은 모든 이의 예상대로 반 페르시가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