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승근기자] 무분규 20년의 벽은 높았다. 현대중공업이 20년 만에 파업 직전에 처했다. 2분기 1조1000억원이 넘는 사상 최대의 충격적 적자를 낸 현대중공업으로서는 수주 급감에 파업마저 겹치면서 하반기 경영실적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현대중공업 노조는 3일 중앙노동위원회에 쟁의조정신청서를 접수했다. 앞으로 10일 간의 조정절차를 거쳐 중노위에서 ‘조정중지’ 결정이 나오면 노조는 전체 조합원의 찬반투표를 거쳐 파업에 돌입하게 된다.
노조는 추석 연휴가 끝난 뒤 쟁의대책위원회를 열고, 파업 찬반투표 등 향후 투쟁 일정을 마련하기로 했다. 중노위의 조정절차 기간을 감안하면 본격적인 파업 돌입 시기는 오는 15일쯤으로 예상된다.
이날 노조의 쟁의조정 신청에 앞서 현대중공업 노사는 지난 5월14일 임단협 상견례를 시작으로 최근까지 총 35차례의 협상을 진행했다. 하지만 노사 양측은 끝내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파업 수순을 밟게 됐다.
노조는 임단협 초기 ▲임금 13만2013원(기본급 대비 6.51%) 인상 ▲성과금 250%+@ ▲호봉승급분 2만3000원을 5만원으로 인상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등을 요구했다. 이에 사측은 올해 수주감소 및 실적하락 등 경영상의 어려움을 이유를 들어 노조 요구를 거부했다.
이후 지지부진한 협상이 지속되다 노조가 쟁의신청 계획을 밝히자 사측은 지난 1일 ▲기본급 호봉승급분 2만3000원을 포함해 3만7000원 인상 ▲성과급 지급 기준에 의거한 산출 ▲생산성 향상 격려금 300만원 및 경영목표 달성 격려금 200만원 지급 ▲정기상여금 700%를 통상임금에 포함하는 등의 진전된 안을 노조에 제시했다.
하지만 노조가 사측의 제안을 거부하고, 예정대로 지난 2일 ‘2014년 임·단협 경과 보고대회’에 이어 3일 중앙노동위원회에 쟁의조정 신청을 접수하면서 19년 동안 이어져 온 현대중공업 무분규 전통은 깨지게 됐다.
지난 2일 열린 ‘2014년 임·단협 경과 보고대회’에서 정병모 노조위원장은 “돈 잘 벌 때는 계열사만 늘리더니 조금 어렵다고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며 “쟁의조정 신청 등 파업 수순을 밟아 임금 삭감과 단협을 개악하는 회사를 심판하자”고 투쟁 열의를 높였다.
이에 회사 측은 "어려운 경영여건 속에서도 최선의 안을 제시했고, 노조 측과 차이나는 부분에 대해서는 끝까지 협상을 통해 합의를 도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업계에서는 이번 현대중공업 노조의 파업에 같은 지역에 소재한 현대차 효과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 12년 만에 강성 지도부가 들어선 것도 그동안 같은 울산 지역에 있는 현대차에 비해 낮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인식이 한몫 했다는 분석이다.
울산에 나란히 위치한 현대중공업과 현대차는 모두 범현대가 기업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자동차, 조선사다. 하지만 강성 기조의 현대차 노조 집행부에 비해 유연한 집행부가 현대중공업 노조를 맡으면서 양사의 임금 등 근로조건 격차는 커졌고, 이는 상대적 박탈감만 불러왔다는 평가다.
대표적인 강성 노조로 알려진 현대차 노조의 경우 매년 사측을 압박하는 극한 투쟁을 통해 임금 인상 폭이 현대중공업에 비해 컸던 것이 사실. 이에 현대중공업 노조는 강성 집행부를 내세워 19년간 무파업의 대가를 이번에는 반드시 쟁취하겠다는 입장이다.
한편 조선업계에서는 현대중공업의 파업 진행 상황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다. 현대중공업이 조선업계 맏형인 데다 아직까지 통상임금에 대한 전례가 없기 때문에 현대중공업 노사 합의사항이 국내 조선업계의 기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현대중공업이 파업에 돌입할 경우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자동차나 다른 제조업과 달리 선박은 건조기간이 길어 최소 3개월 이상 파업이 지속돼야 사측의 피해가 실제적으로 발생한다”며 “이를 알고 있는 노조에서 장기 파업으로 몰고 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현대중공업 노조 홈페이지에는 파업 참여를 독려하는 글과 함께 ‘느긋하게 준비하자’는 글도 속속 올라오고 있다. 노조의 느긋함에 비해 사측의 다급함은 커졌다.
(사진=뉴스토마토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