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에는 집을 나섰다. 주말 내내 집에만 있는 건 힘들다. 달리 갈 곳이 있는 건 아니어서, 사무실로 향했다. 출근한 직원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누가 내 눈치를 보는 건 내가 눈치를 봐야하는 것만큼이나 불편하다. 조용히 사무실에서 시간을 때우다 저녁때쯤, 아니 저녁은 먹고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아침 점심을 이미 집에서 먹었으니까.
다행히 사무실엔 아무도 없었다. 넓은 테이블 가운데에 신문을 펼쳐 놓았다. 제대로 읽진 않을 테지만 펼쳐진 신문은 좋은 핑계거리가 된다. 누군가 들어오면, “허허 집에선 신문 구독을 안 하거든”하며 사람 좋은 웃음을 한번 짓는다. 그러면 경계하는 눈초리가 조금은 누그러진다. 가끔 경계가 빠지고 경멸이 비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상관없다. 여기서 오후 내내 누릴 평화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좋다.
의자 등 받침을 뒤로 주욱 밀어 눕다시피 앉았다. 창 밖에는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은행잎의 노란색이 싫었다. 파릇파릇, 상큼한 봄의 노랑에 비해 가을의 노랑은 어딘지 거무튀튀하다. 사실 저 은행잎은 죽어가고 있는 것 아닌가. 봄?여름동안 충만했던 잎의 생명력이 서서히 빠져나가, 파릇파릇하던 것들이 이제는 칙칙하고 누렇게 변한 거다.
명을 다한 잎들 밑에서, ‘단풍놀이’ 운운하며 돗자리 깔고 닭이나 뜯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악취미다. 혹자는 감수성이 뛰어나서 은행잎들이 다음 해에 돋아날 싹들을 위해 숭고한 희생을 하는 것처럼 묘사하기도 하지만, 하늘 아래 어떤 것도 스스로의 끝을 달가워하지는 않는다. 기꺼이 나무에서 떨려나가는 잎 같은 건 없다는 말이다.
“딸랑”
벨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이다. 위에서 협상이니 뭐니 한다더니 이번에 신입을 좀 더 뽑은 모양이다. 좀체 신입이 없던 우리 부서에 들어왔으니 한동안 고생 좀 할게다. 선배가 시킨 과제를 하러 왔다는데, 고개만 까딱 숙여 인사하곤 제자리로 쪼르르 들어갔다. 저 친구도 내가 불편한 걸까. 그 '협상' 이후로 내 눈치를 보는 사람들이 늘었다.
집에 있는 아들놈 생각이 났다. 무슨 생각인지. 여기저기 쏘다니기는 하는데 요새 뭐하는지 물으면 잘 대답도 안 한다. 밥 먹을 때는 얼굴에 흙빛을 잔뜩 드리우고 앉아있어서, 말 걸기도 무안하다. 주말이면 제 방에 들어앉아 영어공부 같은 것을 한다고 하는데, 그것 때문에 티비도 마음대로 못 본다. 리스닝, 스피킹 할 땐 주변이 조용해야 한다나.
할일 없어 보이긴 싫어서 짐짓 신문을 보는 체 하며 앉아 있는데, 신입사원이 슬쩍 다가왔다. 아까 대충 인사했던 게 마음에 걸렸는지 시덥잖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달리 할 말이 없어 아들 핑계로 취업 얘기를 물어봤다. 여기 들어온게 꽤 자랑스러웠던지 그는 한참을 떠들었다. 눈치가 빠른 친구는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답이 없자 멋쩍었는지 그는 일어서 창가로 향했다. “햐 부장님, 은행잎이 예쁘네요.” “어, 그러게 예쁘네.” 짧게 대답하곤 얼른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잎이 곧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낙엽. 사진/바람아시아
**이 기사는 <지속가능 청년협동조합 바람>의 대학생 기자단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젊은 기업가들(YeSS)>에서 산출하였습니다. 뉴스토마토 <Young & Trend>섹션과 YeSS의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asia)에 함께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