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조승진 기자]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이 "여성 인권을 존중하겠다"고 강조했다.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았던 여성 억압과 이슬람법에 따른 엄격한 사회 통제를 바꾸겠다면서도 "이슬람법의 틀 안에서"라는 단서를 달았다.
탈레반의 전향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무리라는 시각이 강하다. 여성 인권을 강조한 지 하루 만에 부르카(전신을 다 가리는 여성 의복)을 입지 않은 여성이 길거리에서 총살 당하는 일이 벌이지고 있는 상황이다.
영국 BBC에 따르면 자비훌라 무자히드 탈레반 대변인은 17일(이하 현지시간) 수도 카불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아프간 전쟁은 종료됐다고 선언한 뒤 사면령이 선포된 만큼 이전 정부나 외국 군대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복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여성의 권리를 존중해 여성의 취업과 교육도 허용할 계획이라면서 여성의 정부 참여를 독려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무자히드 대변인은 국제 매체들의 질문도 받아 답변하는 등 분명 과거와는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이번 기자회견을 통해 과거 집권했을 때처럼 국제사회의 외면을 받지 않고 정상적인 국가로 인정받으려는 의도가 깔린 것으로 풀이된다.
이슬람 여성들이 전통 의복을 착용한 모습. 부르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덮는 의상으로 눈도 망사로 덮어야 한다 니캅은 눈을 제외한 전신을 가린다. 사진/뉴시스
그러나 아프간 시민들은 탈레반의 전향적인 변화에 불신을 드러내고 있다. 여성인권 운동을 하다가 탈레반으로부터 총격을 받고 살아남은 파키스탄 여성 말랄라 유사프자이(24)는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일부 탈레반 인사들이 여성이 교육받고 일할 권리를 부정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여성 인권을 폭력으로 탄압한 탈레반의 역사를 고려하면 아프간 여성들의 두려움은 현실”이라는 글을 썼다.
실제로 이날 탈레반이 부르카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길거리에서 여성을 총살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여성 인권을 존중하겠다고 밝힌 지 하루만이다.
폭스뉴스는 “전날 아프간 타하르 지역에서 한 여성이 부르카를 착용하지 않고 나갔다가 총에 맞아 숨졌다”고 밝혔다. 보도에 따르면 여성은 총을 맞고 피범벅이 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부모와 주변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과거 탈레반이 집권한 1996∼2001년 아프간은 이슬람 샤리아법(종교법)에 의해 여성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이 자행됐다. 불륜을 저지른 여성을 돌로 쳐 죽게 하는 벌이 허용됐고, 여성은 취업 및 각종 사회 활동이 제약됐다.
교육 기회 또한 박탈돼 여성 중학교부터 다니지 못했다. 외출할 때는 전신을 가리고 눈 부위마저 망사로 덮는 부르카를 착용해야만 했다. 이를 어기고 여성이 신체 일부를 노출하면 마구 폭행하거나 채찍질을 했다. 춤, 음악, TV 등 오락이 금지됐고 도둑의 손을 자르는 일도 허용됐다.
아프간 여성들은 현재 거리에서 자취를 감춘 상태다. 탈레반에게 해코지를 당할까 두려워하며 집에만 머문 탓이다. 아프간 현지 매체 톨로뉴스는 이날 “카불에서 평소 흔하던 여성들의 모임이 사라졌다”며 “공공에서 여성의 존재감이 눈에 띄게 희미해졌다”고 전했다.
아프간 수도 카불 시내에는 미용실이나 결혼식 광고 속 머리카락이 드러난 여성 사진들에 흰 페인트가 덧칠해졌다. 뉴욕타임스는 “탈레반이 앞으로 아프간을 어떻게 통치할지 엿볼 수 있는 광경”이라고 분석했다.
유럽연합(EU)의 경우 여성과 소수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탈레반과 대화해야 한다고 나섰다. EU의 주제프 보레이 외교·안보 정책 고위대표는 “인도주의적 재앙과 이주민 관련 참사를 막기 위해 최대한 빠르게 대화에 나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탈레반의 지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며 “협력은 평화롭고 포괄적인 분쟁 해결과 여성과 소수자를 포함해 모든 아프간인의 기본권 존중, 테러 단체의 아프간 영토 사용 방지 등 이행을 조건으로 할 것”이라고 했다. 대화가 인권을 위한 것임을 명확히 한 것이다.
지난 13일 아프간 수도 카불의 한 공원에 있는 텐트 안에서 부르카를 입은 여성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조승진 기자 chogiza@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