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문턱에 들어서자 와인장터가 잇따르고 있다. 이마트 트레이더스를 필두로 롯데마트가 할인행사에 들어갔고 이마트도 가을장터를 열었다. 대형마트와는 별개로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 유명한 지역 매장들도 자체 행사를 진행 중이며, 편의점들도 매달 품목을 정해 릴레이 이벤트를 벌이고 있다.
규모를 키운 대형마트들의 행사 덕분에 올해에도 와인 판매고는 신기록을 예약해 놓았다. 코로나19 영향으로 홈술족이 증가하면서 지난해에 수입액 3억3000만달러로 새로운 기록을 썼는데 올해는 일찌감치 작년 기록을 넘어섰고 관심사는 증가율이 얼마나 될지에 맞춰져 있다.
어쩌다 보니 시류에 휩쓸려 이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와인을 입에 댄 것은 10년이 됐지만 뒤늦게 불이 붙어 지난 몇 주 동안 할인장터를 쫓아다녔다. 엊그제는 이마트의 점포별 할인행사 품목과 가격이 빼곡히 적힌 엑셀파일을 30분쯤 들여다보다 '현타'를 세게 맞기도 했다.
이렇게 조금씩 알아가다 보니 와인 애호가들의 소비 행태가 주식투자자와 많이 닮았다는 것을 느끼는 걸 보면 직업병은 고치지 힘든가 보다. 가장 도드라진 공통점은 밸류에이션의 중요성과 전문가 평가에 대한 의존도다.
와인은 소비자 개개인의 기호가 매우 강하게 작용하는 소비재다. 하지만 실제로는 소수의 의견이 개별 소비자의 구매 결정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평가점수다. 로버트 파커 등 소비자들이 신뢰할 만한 전문가 또는 업체에서 해당 와인에 매긴 점수가 소비자의 와인 구매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이는 곧 판매가격에도 반영된다. RP 100점이면 무조건 잡아야 한다고 여겨진다.
그래도 이건 전 세계적으로 통하는 기준치니까 그렇다 치고, 요즘엔 유명 유튜버가 호평하면 해당 와인을 찾는 사람들이 급증하는 현상도 벌어진다. 수요가 늘어나니 판매처는 마음 놓고 가격을 올린다. 한국 소비자들만 호구되는 거냔 불평이 나오지만 값이 올라도 사는 사람이 있는데. 어쩔 도리가 없다.
로버트 파커가 증권사 애널리스트라면 유튜버는 슈퍼개미쯤 될까? 주식은 증권사와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추천을 걸러들을 수 있는 구력이 되지만, ‘와알못’ 입장인지라 귀가 얇아 이런 말 한마디를 흘려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또 하나 특징은 남들 사는 걸 산다는 점이다. 와인 전문 아울렛과 대형마트 할인행사장에서 한껏 채운 소비자들의 장바구니를 보면 겹치는 품목이 꽤 많은 걸 볼 수 있다. 행사하는 와인이라서 하나씩 담은 이유가 크겠지만, 그게 아닌 경우도 많다. 잘 모를 때는 남들이 사는 걸 사는 게 실패를 줄이는 방법이라서 그럴 것이다. 나 역시 이 단계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그게 정답은 아니다. 개인의 기호가 반영되지 않았으니까.
이와 같은 따라 하기 소비 행태는 스스로 밸류에이션 할 능력이 없어서 생기는 일이다. 어쩌면 의존하는 게 편해서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와인의 가치를 측정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자니 시간과 돈이 너무 많이 들 것 같다. 전문가에게 또 다른 소비자에게 의존하는 것이 합리적인 방법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와인은 전문가의 의견을 따라서 실패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은데 주식은 다르다. 열심히 흉내를 냈는데 실패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다행히 주식은 와인에 비해 기초적인 밸류에이션 방법을 익히는 데 품이 덜 든다. 주식투자는 남에게 의존하는 것보다 지금 당장 공부를 시작하는 쪽이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다.
사족. 흥미로운 것은 와인의 평가점수와 가격이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주식도 마찬가지. 지금은 남들이 몰라봐도, 중저가 와인 중에도, 미래의 성장주는 숨어 있다.
김창경 재테크전문기자 ckkim@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