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최근 예기치 못한 팬데믹 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의 팬데믹은 우리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거대한 풍파이고, 많은 사람들이 이 풍파 속에서 힘들어하고 있다.
특히,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 등 감각장애인들은 의사소통 및 정보습득 제약으로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비대면·비접촉의 파고는 외부와의 단절로 이어지고 있다. 즉 집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2020 국민여가활동조사’(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선호하는 여가활동으로 TV시청이 67.6%로 가장 높았고, 모바일 콘텐츠 시청이 32.6%로 집계됐다. ‘2020 서울시민 문화향유 실태조사’(서울문화재단)에서는 주말·휴일 여가활동으로 TV/비디오시청이 72.1%로 집계된 바 있다.
이 결과를 보더라도 대다수의 국민들이 안방에서 미디어를 향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 등은 집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증가하는 만큼, 안방에서의 미디어 향유로부터 배제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미디어를 시청함에 있어 시각장애인에게는 '화면해설', 청각장애인에게는 '한국수어', 그리고 미디어 플랫폼에 대한 접근성 구현도 필수적으로 필요한 사항이다. 그러나 지상파·종합유선방송 등이 이들 서비스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은 10% 이하이고, OTT 등에서는 극소수에 불과하며, 플랫폼 접근성은 구현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다. 심지어 보도 프로그램 등에서는 화면해설은 전무하고, 한국수어는 일부 프로그램에서만 제공되고 있어,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들의 알 권리에 큰 차별이 벌어지고 있다.
80년대 초반, 필자의 집에 양문형 흑백TV가 들어왔던 때가 생각난다. 필자의 집에 TV가 설치되기 전에는 인기 있는 드라마를 보기 위해 TV가 있는 집들을 찾아다녔다가, TV가 들어오고 나서는 발품파는 수고 없이 인기 드라마를 시청했었다. 당시만 해도 집에 TV가 있는 아이들은 으스대며 다녔고, TV가 없는 아이들은 TV 시청권을 획득하기 위한 물밑 노력들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집집마다 TV가 설치된 것을 넘어, 개개인별로 휴대폰을 지니고 있다. 현대의 휴대폰은 그저 전화를 걸고받는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TV이고, 이동하는 영화관 역할을 한다. 미디어에 접근하는 수단이 TV에서 휴대폰으로까지 확대되면서 풍요로운 미디어 향유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우리 속담 중 "그림의 떡"이라는 말이 있다. 미디어의 접근 수단이 확대됐지만,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 그리고 발달장애인 등에게는 미디어의 접근과 향유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다.
팬데믹이 아닌 시대에도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의 미디어 향유는 상영관의 접근성 부재, 화면해설과 수어 제공 영상물의 부족 등 여러 장벽들이 있었으며, 팬데믹 시대에서는 비대면·비접촉이 더해져 미디어 향유를 가로막는 장벽의 높이는 더 높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장벽은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에게만 국한된 일이라 생각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며, 조만간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령층에게도 미디어의 향유는 매우 중요한 과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령층의 미디어 향유 정책은 부재하다시피 하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가 발표한 ‘소외계층 미디어 포용 종합계획’은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의 ‘미디어 향유 갈증’을 해갈시켜줄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 그리고 고령층이 미디어에서 겪었던 차별과 배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된다. 이 ‘종합계획’에는 그간 관련 단체들이 요구해왔던 사항들이 대폭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은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뤄볼 때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관계자 여러분들께 이 글을 빌어 감사를 표한다. 아울러 재정당국 역시 투입 대비 산출의 논리가 아닌 보편적 인권 보장의 차원에서 접근해줄 것을 요청한다.
지난 시간이 ‘미디어 접근’을 위한 시간이었다면, 이제는 ‘미디어 향유’를 위한 시간이 시작됐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자라나는 농작물을 간절한 마음으로 관리하듯, ‘미디어 향유’로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은 이번 ‘종합계획’이 순조롭게 안착돼 모든 사람이 미디어로부터 자유로운 환경이 되도록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이익의 많고 적음을 떠나 공존과 상생이 무르익는 마음의 풍요를 기대한다.
이연주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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