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윤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소장
선거 기간 중 한 말을 지키겠다는 것 자체야 백번 환영한다. 그런데 시간과 '쌩돈'이 너무 아깝다. 대통령 집무실 얘기다. 그럴 사안이 아닌 걸 '중대 현안'으로 만드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자기 발목을 스스로 잡는 자충이 아닌가 싶다. '대통령실 이전' 방침이 윤석열 후보의 주요 득표 포인트는 아니었다. 그러니 식언해도 좋다는 건 아니다. 일의 우선 순위 설정과 완급 조절이 이래서야 어디 국정을 잘 이끌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든다. 인수위의 시간과 돈 아껴쓰기 바란다. 그 시간과 돈, 당선인과 인수위 소유가 아니라 국민들 것이다.
현 정부가 집무실 이전에 드는 예비비의 국무회의 안건 상정을 보류하자, "통의동 인수위 사무실 쓰겠다"고 응수했다. "그래? 한 번 붙어보자"는 결기나 어깃장으로 읽힌다. 신구 권력 간 견해 차이가 서로 감정적 대립으로 치닫는 것 같다. 위험지경이다. "한국은행 총재 인사 협의했다, 안했다", "이전비용 496억원은 기재부 추산이다, 아니다 추산한 적 없다", 급기야 청와대는 "이러면 그간 얘기 다 까겠다"는 지경에 이르렀다. 양측의 상호 존중이 필요하다.
당선인은 집무실 이전에 반대 의견이 많으리라는 걸 충분히 알고 있었던 듯하다. 지난 20일 본인이 직접 지시봉 들고 조감도 앞에서 설명할 때 "여론조사로 해결할 사안이 아니라 용단과 결단이 필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결국은 "소통 때문에 청와대 안들어가겠다"는 건데, 지금 이런 상황은 소통을 잘하고 있는 건가. 몇몇 여론조사에 따르면 집무실 이전 반대여론이 더 많다(리얼미터 : 찬 44.6% 반 53.7%. 미디어토마토 : 찬 33.1% 반 58.1%). 물론 모든 일을 여론조사대로 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여론 흐름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는 건 소통의 기본 아닌가. 자존심 차원이거나, 일종의 '기 싸움'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정권이 본격 출범도 하기 전에 이 무슨 평지풍파인가. 또, 이런 점도 생각해봐야 한다. 나중에 어느 대통령 당선인이 "전임자들 집무실 안 쓰고 따로 만들겠다"고 하면 이번처럼 또 입주할 곳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하나.
지금 국민이 궁금해하고,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집무실 위치가 아니라, 국민통합과 양극화해소 등에 관한 당선인의 솔직한 구상과 정책 기조다. 정식 출범도 하기 전에 시간과 에너지를 왜 분산시키고 낭비하는지 안타깝다. 소통과 탈권위는 집무장소가 아니라 집무태도와 업무방식의 문제다. 소통하려는 자세가 돼 있으면 어디서든 할 수 있다. 국방부 청사로 가면 절로 소통이 되나? 거기는 구중궁궐이 아니라 아예 요새인데. 차라리 현 청와대 담장 허물고, 경호도 최소 수준으로 하면 '시민 속으로!'는 더 효율적이지 않겠는가. 반대 의견과 쓴소리 경청이 소통의 시작이다.
두 기관(대통령실과 집 비워주고 나가야 할 기관들) 이전 비용, 코로나 손실보전이나 극빈자 지원에 쓰는 게 타당하다. '송파 세 모녀'들, 지금도 도처에서 출구없는 절망 속에 허덕이고 있다. "가난은 나라도 못구한다"고? 그건 수탈적 왕조시대의 기만이고, 지금은 나라가 구하는 게 맞다. 게을러서 가난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발버둥치며 일해도 빠져나올 수 없는 가난은 구조의 문제다. 그 구조, 곧고 바르게 펴는 게 국가와 정부의 역할이자 의무다.
우려스러운 점은 또 있다. 지난 21일, 당선인의 "기업이 잘 되는 게 곧 나라가 잘 되는 것"이라는 경제 6단체장 회동 발언에는 동의할 수 없다. 허창수 전경련 회장은 벌써 "기업 옥죄는 중대재해처벌법 개정"을 요구했다. 언어도단이다. 그냥 '기업이 잘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노동자 상생과 글로벌 스탠다드 지키면서 잘 되는 게 중요하다. 이런 사항은 이미 우리가 이룩한 '사회적 합의'이자 성취이고, 당연히 강화해야 할 상식이다. 정권 바뀌었다고 폐기할 정파적 사안이 아니다.
비자금 만들고, 뇌물바치고, 탈세하고, 노동현장 안전수칙 경시하면서 이익만 늘리려는 나쁜 성장은, 지금보다 더 엄한 철퇴를 내려야 한다. 이건 당선인이 그렇게 강조해온 '공정 상식 법치' 관점에서도 추호의 이견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코로나 회복방안과 추경, 양극화해소 중장기 대책 제시가 먼저다. 집무실 건은 취임 후 절차 제대로 밟아 시간 여유 충분히 확보한 상태에서 추진하고, 이제는 새 정부의 비전과 국정과제를 얘기할 시간이다. 새 정부 출범 때까지 채 50일도 남지 않았다. 지금 무엇이 중한가.
이강윤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소장(pen3379@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