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배덕훈 기자] “(개선위는) 삼성물산 합병 사건 때 구조와 똑같습니다. 당시 외부 위원회에서 하면 (합병이) 부결될 게 뻔하니까 국민연금 내부 ‘투자위원회’에서 처리했거든요. 개선위는 투자위원회와 다를 바가 없어요.”
시민단체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의 오종헌 사무국장은 최근 <뉴스토마토>와의 인터뷰에서 국민연금공단이 추진 중인 ‘건강한 지배구조 개선위원회’(개선위) 설립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무엇보다 과거 삼성물산 합병 당시 벌어진 ‘어두운 역사’가 재현될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그가 언급한 어두운 역사란 지난 2015년 국민연금공단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건과 관련해 외부 전문위원회를 배제하고 내부 투자위원회에서 찬성 의결을 해 논란이 됐던 일을 말합니다.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왼쪽)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관리공단 기금운용본부장 (사진=연합뉴스 제공)
당시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은 외부 인사로 구성된 ‘주식 의결권 행사 전문위원회’가 합병에 반대할 우려가 있다며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 내부 투자위원회에서 안건을 다루라고 압력을 넣었습니다. 이에 홍완선 기금운용본부장은 기금운용본부 내부 투자위원회 위원들에게 합병 찬성을 지시, 국민연금에 거액의 손해를 끼쳐 국민적 분노를 샀습니다.
이 같은 폐단을 막고자 2018년 국민연금공단은 일종의 안전장치를 설치합니다. 기금운용위원회 내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책위)에 ‘안건부의 요구권’을 마련한 건데요. 수책위 위원 9명 중 3인 이상이 요구할 경우 이사 선임이나 합병 등 주요 주총 안건에 대한 찬반 또는 중립 등의 의사결정권을 수책위에서 행사할 수 있도록 한 겁니다.
하지만 오 사무국장은 개선위가 설립되면 수책위는 유명무실해질 것으로 봅니다. 개선위는 위원 10명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호선하게 돼 있어, 사용자·노동자 등 다양한 가입자 단체로 구성된 수책위보다 독립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기금운용본부나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현재 국민연금기금 운용규정에 따르면 기금운용본부가 판단을 하기 곤란한 안건은 수책위에 결정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선위가 설립되면 이러한 안건들을 수책위를 패싱한 채 개선위에서 논의할 길이 열립니다. 삼성물산 합병 찬성 사태와 유사한 상황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겁니다.
오 사무국장은 “(개선위 설립은) 민감하거나 판단하기 곤란한 사안들을 노동시민사회나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외부 전문가위원회에서 객관성을 담보하면서 최대한 바른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 만든 의사결정 체제를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수책위 위원 구성 변경으로 강해진 친정부·자본 입김
특히 기금운용회가 개선위 설치 예고에 앞서 수책위의 위원 구성을 변경한 점 역시 수책위를 무력화려는 의도로 비친다는 게 오 사무국장의 주장입니다.
그동안 수책위는 가입자 단체(근로자, 사용자, 지역가입자) 추천 위원 9인으로 구성돼 3:3:3 구조를 유지했습니다. 어떤 단체든 3인 이상으로 구성됐기 때문에 단체별로 의견만 일치하면 안건 부의를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기금운용회는 지난 3월 각 가입자 단체 추천 인원을 1명씩 줄이고 새로이 전문가 단체 추천 몫 3인을 추가해 2:2:2:3 구조로 변경합니다. 사실상 각각의 가입자 단체가 자체적으로 안건 부의 요구를 하기 어려운 구조가 된 겁니다.
지난 3월 열린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에서 기금 개악에 반대하는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 회원들이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 제공)
더구나 새로이 추가된 전문가 단체도 친정부, 친자본 성향이 짙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여기서 전문가 단체는 자본시장연구원·한국금융연구원·한국증권학회·한국연금학회 등을 말합니다. 이에 따라 실제 안건 부의 요구를 통해 수책위로 안건이 회부되더라도 정부·자본의 입김이 반영된 의견으로 결론지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국민연금, 수탁자 책임 활동 취지 살리는 올바른 의사 결정해야”
오 사무국장은 수책위 형해화와 개선위 설립이라는 일련의 상황들이 “정권과 자본이 기금의 통제권을 강화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의결권 등을 행사하도록 기반을 만드는 과정”으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는 공적 연금의 민영화로 가기 위한 단계라는 의심까지 낳습니다.
“국민연금 민영화 시도가 될 겁니다. 작년이나 올해나 기재부 경제정책 방향에 계속 명확하게 명시되고 있는 건 사적연금 활성화입니다. 공적 연금인 국민연금에 대해서는 개혁을 강조하면서 부정적인 이미지만 강화하고 있어요. 개혁이 필요하다, 이대로 가면 미래세대 부담이 커진다는 식으로요. 사적연금은 재계의 숙원인데요. 결국 공적 영역들을 계속 축소해 나가고 사적 영역들을 확대해 나가면서 자신들의 이권을 채워 나가는 거죠.”
오종헌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 사무국장 (사진=배덕훈 기자)
오 사무국장은 국민들의 재산을 국민연금공단이 수탁받아 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권과 자본 등 외풍에 흔들리지 않고 올바른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투자하는 기업의 장기적인 가치를 제고해 성장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을 하고 그 이익이 국민들에 환원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탁자 책임활동의 의도나 목표는 기업이 잘 되는 방향입니다. 다만 기업이 잘 되는 것과 재벌이 잘 되는 것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바른 의사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국민연금공단이 계속 왜곡된 의사결정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고 있어요. 국민연금이 수탁자 책임활동에 있어서 원래의 원칙을 충실히 살리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을 해야 합니다.”
배덕훈 기자 paladin703@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