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기토' 향한 P의 여정, 에르고 품고 달린다

(이범종의 게임 읽기)'P의 거짓'①사유의 주체 되려는 AI, 피노키오
데카르트 명제 "코기토 '에르고' 숨"
에르고는 접속사면서 이성 활동이란 뜻도 있어
거짓말 하면 '에르고가 속삭이며' 인간성 얻어
최지원 감독 "그 해석 환영···정답은 당신 몫"

입력 : 2023-09-14 오전 12:00:00
무수한 생명이 하나의 세계를 살다 갑니다. 뱀은 온도의 세계를, 박쥐는 초음파의 세상을 삽니다. 반면 인간은 그저 주어진 하나의 세계를 사는 데 만족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펜을, 때로는 마우스를 들고 빅뱅에 버금가는 창작의 고통을 감내하며 새 세상을 창조해냅니다. 그렇게 연극 무대가 세워지고 영화가 개봉됩니다. 거울과도 같은 세상으로 초대된 관객은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웃고 웁니다. 응시하는 관객,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관객을 아예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영화도 있습니다. 바로 게임입니다. 주체가 된 관객을 우리는 게이머라 부릅니다. 주말 아침 플레이스테이션을 켜는 아버지, 숙제 끝내고 컴퓨터 앞에 앉은 딸은 어느 세상 속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려는 걸까요. '이범종의 게임 읽기'는 게임 속 세상을 든든히 받치고 있는 이야기의 만듦새와 구조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두 번째 순서로 네오위즈 산하 라운드8 스튜디오가 동화 '피노키오'를 성인용 잔혹극으로 재해석한 소울라이크 게임 'P의 거짓'을 다섯차례에 걸쳐 소개합니다. P의 거짓은 16일 한정판 사전 실행과 19일 정식 출시를 앞두고 있습니다. (편집자주)
 
[뉴스토마토 이범종 기자] 멈춘 기차의 어둑한 화물칸. 파란 나비가 간절한 목소리를 타고 날아와, 차갑게 식은 소년의 가슴에 스며듭니다. "들리나요? 제페토의 인형···. 당신이 필요해요."
 
푸른 연료 '에르고(Ergo)'를 흡수해 깨어난 '자동인형' 피노키오(P)는, 비 오는 새벽 기차역을 휘젓는 폭주 인형을 해치우며 아버지 제페토가 있는 크라트(Krat) 시의 어둠에 젖어들어갑니다. 사람을 좀먹는 화석병 창궐과 인형 폭주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네오위즈(095660) 산하 라운드8 스튜디오는, 꼭두각시 피노키오가 숙명의 실을 끊어가는 이야기를 잔혹하고 섬세하게 변주합니다. 과연 라운드8은 자동인형의 동력원인 에르고와, 폭주 인형이 지켰어야 할 규칙인 '위대한 약속'을 통해 어떤 성찰을 제안하고 있을까요?
 
파란 머리 요정을 재해석한 캐릭터 '소피아'가 피노키오에게 거짓말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사진='P의 거짓' 진행화면 캡처·편집)
 
동화 피노키오 변주한 'P의 거짓'
 
오늘은 우선 네오위즈 게임 'P의 거짓' 속 자동인형, 즉 인공지능(AI) 로봇과 에르고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자, 'P의 거짓' 속 세계로 서서히 들어가볼까요. 어느날 '섬의 연금술사'라는 조직이 훗날 자동인형의 동력원이 될 에르고를 발견했고, 이 발견 덕에 기술의 진보가 전례 없이 빨라졌습니다.
 
자동인형은 공방연합 대표이자 천재 장인 제페토가 만들었습니다. 제페토 덕분에 경찰과 헌병, 역무원, 호텔리어, 가사 도우미 등이 맡던 노동을 인형이 대신하게 됐고, 결과적으로 인간의 삶의 질도 높아졌습니다. 도시 이름 크라트는 기술 고위 관료인 '테크노크라트(Technocrat)'와 비슷하다는 점도 기술 중심 사회의 모습을 짐작하게 합니다.
 
피노키오도 제페토가 만든 자동인형 중 하나로 그려집니다. 그러니까 이 게임 속 피노키오는 동화 속 피노키오의 AI 버전인 셈인데요. 'P의 거짓' 속 피노키오는 에르고를 모아 성능을 개선하고 필요한 물건도 구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피노키오의 능력, 즉 거짓말 할 수 있는 능력도 탑재했습니다. 다만 여기서 거짓말 능력은 AI의 답변 오류를 뜻하는 '할루시네이션'과는 다릅니다. 'P의 거짓' 속 에르고는 자동인형인 피노키오가 '인간적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장치입니다.
 
그런데 이 에르고라는 말, 어디서 많이 들어보시지 않았나요.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방법서설>, 1637).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의 이 유명한 명제는 신의 피조물에 불과했던 인간을 확고한 사유의 주체로 일으켜 세운 근대 정신을 대표하는 말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에르고라는 단어가 여기에 포함돼 있죠. 라운드8 스튜디오가 데카르트의 명제에서 힌트를 얻어 이 작품을 만든 것인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후술하겠지만, 최지원 감독에게 물었으나 뾰족한 답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코기토 에르고 숨'을 대입하면 'P의 거짓' 속 세계의 의미가 한층 명확해진다는 점입니다.
 
'P의 거짓'에서 피노키오가 에르고 조각을 깨트려 자신의 몸으로 흡수하고 있다. (사진='P의 거짓' 실행 화면 캡처)
 
참·거짓 의심하는 이성, 코기토
 
'P의 거짓'에서 게임 속 장치로 직접 등장하는 '에르고'는 접속사이면서 동시에 '이성활동'이란 뜻도 지니고 있습니다. 또 데카르트의 명제 속 코기토는 '참과 거짓을 의심할 수 있는 사유 주체'로서, 순수한 이성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에르고(이성활동)를 열심히 모으는 피노키오는 결국 코기토(이성의 주체)가 되려고 게임 속을 종횡무진하는 걸까요? 아닌 게 아니라 게임 속 피노키오는 새 보스와 대면할 때마다 거대한 문을 힘겹게 여는데, 마치 한 명의 코기토가 되기 위해 투쟁하는 듯한 이 모습은 어딘가 인간을 연상케 하는 면이 있습니다.
 
보통의 경우 인형은 사람이 인식하는 하나의 대상에 머물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 게임 속에서는 인형인 피노키오가 사유의 주체, 즉 의심하는 능력(이성)을 가진 인간을 속일 수 있도록 설정돼 있습니다. 게임 속 피노키오의 지위는 이처럼 뭔가 특별합니다.
 
하지만 자동인형 피노키오는 '사유하므로 존재하는' 사람은 아니고, 단지 사람을 흉내 낼 뿐이죠. 데카르트는 "나는 내가 사유하는 동안만 존재하고, 사유를 멈추자마자 존재하는 것을 멈춘다"고 했습니다(<성찰>, 1641). 여기서 존재는 육체가 아니라 정신과 영혼, 지성이나 이성입니다. 자동인형인 피노키오의 몸에는 인간의 자아가 없습니다. 그러니 데카르트 관점에서 피노키오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데카르트는 사람을 닮은 기계가 기관의 배열에 의해서만 작동할 뿐, 우연히 마주치는 것에 보편적으로 쓸 수 있는 도구인 이성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그럼에도 의심하는 능력인 코기토를 가진 인간을 속일 수 있다는 점이 피노키오를 '특별한 아이'로 만들어 줍니다. 이 특권에 대해, 제페토의 친구이자 크라트 호텔 주인 안토니아가 설명합니다. "네 거짓말은 귀한 능력이란다. 네가 스스로 네 길을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지. 바깥 사람들은 아직도 인형을 두려워하고 꺼린단다. 거짓말로 너를 보호하고 네 길을 찾으렴."
 
피노키오가 이야기 진행 중 거짓말을 하거나 음악 감상 등 인간적인 행위를 할 때 '에르고'가 속삭인다. (사진='P의 거짓' 실행 화면 캡처)
 
태어난 인간 아닌 '거듭나는 인간'으로
 
이성 없이 이성을 상대로 거짓말하는 기계. 데카르트의 명제를 뒤집은 이 설정은 피노키오의 동력원이 접속사 에르고인 이유를 짐작하게 합니다. 에르고는 피노키오의 거짓말로 이야기를 잇는 접속사면서, 그로 인해 인간성을 얻는 수단입니다. 연어가 강을 거슬러 오르듯, 피노키오의 존재도 접속사 에르고를 타고 올라가 코기토로 거듭나려 합니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존재'의 조건으로 이성을 내걸었습니다. 어째서 이성 없는 피노키오라는 '비존재'가 사유하는 존재인 코기토가 될 수 있을까요? 매 순간 P의 거짓말을 선택하는 주체는 코기토인 우리, 게이머이기 때문입니다. 게이머의 이성이 더해지면서, P는 비로소 존재하게 됩니다. 비록 이성의 결정이 거짓말일지라도요. 계속해서 거짓 이야기를 접속사처럼 덧붙여 이어가는 것, 어쩌면 이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개발진은 씁쓸한 농담을 던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 더. 에르고에는 '생각하는 활동'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김명석 이화여대 철학연구소 연구교수는 "에르고는 추론 활동(reasoning)으로 이성 활동, 곧 생각 활동"이라며 "가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피노키오는 이런 에르고 활동을 통해 코기토, 곧 생각하는 실체가 되어간다고 봐도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물론 에르고 활동으로 거짓 믿음으로만 나아간다면 코기토가 되는 데 실패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실제 게임을 진행하다 보면 피노키오가 거짓말을 하거나 음악 감상 등 인간적인 행위를 할 때 '에르고가 속삭인다'는 안내문이 나타납니다. 이야기 진행을 위한 거짓말이 접속사로서의 에르고와 이성 활동으로서의 에르고를 모두 품고 있는 셈이죠.
 
자동인형이 대량 생산되는 베니니 공장 한 구석에서 '데카르트의 수기'를 찾아 읽을 수 있다. 게임 속 데카르트도 인형이 인간성을 얻는 비밀이 '에르고'에 있다고 결론냈다. (사진='P의 거짓' 실행 화면 캡처)
 
게임 속 데카르트 "에르고가 열쇠"
 
이쯤에서 작품을 만든 라운드8의 대답이 궁금해집니다. 저는 지난달 18일 스타필드 하남에서 열린 팬 사인회에서 최지원 P의 거짓 총괄감독에게 "에르고는 데카르트 명제 '코기토 에르고 숨'에서 가져온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저의 해석을 듣던 최 감독은 골똘히 생각하더니 "저는 그런 해석을 환영한다"며 사인에 "정답은 당신의 몫"이라고 적었습니다.
 
재밌게도 저는 한 달 뒤 'P의 거짓' 게임 본편 속을 거닐다 베니니 공장에서 '데카르트의 수기'를 주워 읽었습니다. 작품 속 데카르트는 폭주 인형 '푸오코' 결함의 원인을 탐구합니다. 그는 폭주 인형이 인간의 자아를 갖고 '인형의 왕'을 경배한다는 걸 알게 됩니다. 데카르트는 수기 마지막 장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가 모르는 인형의 비밀이 분명히 존재한다. 아마 에르고, 그것이 열쇠겠지. 하지만 놈들이 인간처럼 깨어나는 시간은 더 빨라지고 있다. 늦기 전에 누군가가 막아야 한다. 모든 인간들을 위해서라도."
 
최지원 P의 거짓 총괄감독은 8월 18일 스타필드 하남에서 열린 팬 사인회에서 "에르고는 데카르트의 명제 '코기토 에르고 숨'에서 가져왔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런 해석을 환영한다"며 "정답은 당신의 몫"이라고 답했다. (사진=이범종 기자)
 
이범종 기자 smile@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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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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