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5일 서울 성북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열린 2024년 과학기술인·정보방송통신인 신년인사회에 입장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뉴스토마토 박주용 기자] 역대 정부마다 상징적인 국가 비전이 있었습니다. 노무현정부의 '균형발전', 이명박정부의 '녹색성장', 박근혜정부의 '창조경제', 문재인정부의 '소득주도성장' 등이 대표적입니다. 성패 여부를 떠나 국민에게 제시한 국정운영 철학이자, 국가의 미래 방향이었습니다.
하지만 출범 20개월을 넘은 윤석열정부의 뚜렷한 국가 비전은 보이지 않습니다. 전문가들도 "현 정부의 국정운영 철학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고 입을 모읍니다. 공허한 '자유' 메아리만 되풀이됐을 뿐이며, 이는 해묵은 이념논쟁, 역사논쟁으로까지 비화됐습니다. 비단 정부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대 양당 또한 비전 없이 상대 실책에 기댄 '극단적 진영정치'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7월 정부의 '6대 국정목표'와 '120대 국정과제'를 최종 확정했습니다. 120대 국정과제에는 '3대 개혁'이라고 불리는 노동·교육·연금개혁과 같은 주요 과제들이 포함됐습니다. 다만 '3대 개혁'의 경우 이를 현실화할 정책 방향과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정부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결국 이들 국정과제 중에서 탈원전 폐기 등과 같은 '반문재인 정책'을 제외하면 정부의 뚜렷한 국정 비전은 사실상 전무한 실정입니다.
실종된 '국가 어젠다'…되살아난 '극우 본능'
사라진 국가 비전 자리엔 '이념'이 들어섰습니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부터 이념을 중시하며 '반국가 세력' '공산전체주의 세력' 등의 극언을 쏟아냈습니다. 여기에 산업기술 R&D(연구개발) 혁신을 주요 과제로 내세웠음에도 올해 예산 편성 과정에서는 연구개발 예산을 지난해 31조1000억원보다 16.6%(5조2000억원) 감액한 25조9000억원으로 편성해 논란을 빚었습니다.
과거 역대 정부들은 임기 초반부터 국가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실천할 중장기적 전략을 세웠습니다. 노무현정부 땐 '균형발전'을 어젠다로 삼아 행정수도 이전을 추진했습니다. 대기업 위주의 산업 구조를 독자기술을 갖춘 중소·벤처기업, 외국인투자기업 등으로 다원화하는 데에도 무게를 뒀습니다. 이명박정부에선 한강의 기적을 이을 새 국가 발전의 패러다임으로 '녹색성장'을 제시하고 4대강 정비 사업과 녹색 뉴딜 사업 등을 추진했습니다. 단군 이래 최대 토목사업이라는 비판은 존재했지만, 논란을 떠나 최소한 정부의 방향만은 분명했습니다.
박근혜정부도 당시 경제 위기 돌파의 새로운 해법으로 지식재산권의 창출과 활용에 초점을 맞춘 융합 산업과 문화 산업에 성장 동력을 집중한다는 구상, '창조경제'를 제시했습니다. 문재인정부 땐 대기업의 성장에 따른 중견·중소기업의 성장이라는 기존 낙수효과를 실패로 규정 짓고, 노동자들의 실질소득을 높여 내수 진작 등 경제 성장을 유도한다는 '소득주도성장'을 새 어젠다로 내놨습니다. 이를 위해 임기 초반부터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주52시간 단축' 등의 정책 드라이브를 펼쳤습니다. 물론 경제계의 반발도 뒤따랐으며, 학계는 물론 정치권 내에서도 격한 논쟁을 불렀습니다.
지난달 29일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국회 민주당 대표실을 예방한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사진=뉴시스)
여야도 진영주의 기댄 '극단적 혐오정치'
국가 비전이 없기는 국민의힘과 민주당 등 거대 양당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윤 대통령의 국정운영 철학과 방향을 뒷받침해야 할 집권여당인 국민의힘이 정쟁거리 외에 무엇을 내세웠는지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정부여당을 견제해야 할 제1야당인 민주당의 정책적 대안도 실종됐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국민의힘은 윤 대통령의 이념 중시 등 편향적 정치·외교·경제 기조에 맞춰 '과거 정권 탓', '이재명 탓'에 매몰됐고, 민주당도 오로지 반윤(반윤석열) 기조 하에 "정권 심판"만을 외칠 뿐 대안 제시는 없었습니다.
결국 양당은 오로지 상대 실정에 대한 반사이익만 기대는 실정입니다. 대화와 타협을 통한 협치의 공간은 사라졌고, 대신 상대를 향한 '증오'가 가득한 극단적 혐오정치만 남았습니다. 말로만 '민생'을 외칠 뿐, 이를 실천하기 위한 실질적인 정책대결 또한 실종됐습니다. 정책이라 해봤자 재원을 혈세로 충당하기는 여야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정책집을 펼쳐놓고 비교해도 차이가 없을 정도입니다.
저출생, 지방 소멸, 기후 위기 등의 국가 미래에 대한 문제가 산적한 데도 어떻게 대처할지 뚜렷한 해법은 여전히 보이질 않고 있습니다. 결국 '정치의 복원'이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박주용 기자 rukaoa@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