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7년 1월25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린 신년기자회견에서 주요 국정현안에 대한 의견을 전달하고 있다. (사진=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제공)
[뉴스토마토 박주용 기자] "지금의 실천이 내일의 역사입니다"(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5주기 슬로건)
15년 전 5월 23일 우리는 큰 별을 잃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15년이 지났지만, 대한민국의 현 상황은 여전히 어둡기만 합니다. 참여정부 이후 국정의 방향성이 실종된 것은 물론, 시대정신 부재로 나침반마저 잃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이 추진한 국정 가치와 철학이 다시금 회자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미래를 위한 정책을 폈던 노 전 대통령의 국정 기조는 극단적 진영정치에 매몰돼 있는 현 정치권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노 전 대통령이 한국 사회에 뿌린 대표적 유산은 '권위주의 청산'입니다. 시민 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징검다리인데요. 그는 제왕적 대통령제 타파를 위한 개헌안도 던진 승부사였습니다. 본지가 '10대 의제'로 선정한 어젠다 역시 노 전 대통령이 추진한 가치와 철학을 담았습니다. 구체적으로 10대 의제를 살펴보면 △정치 혁신 △지방분권과 균형발전 △갈등공화국 극복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민생과 인권 △저출산·고령화 △경제민주화 △글로벌 기술강국 도약 △금융시장 혁신 △기후위기와 에너지 대전환 등이 있습니다.
온몸으로 권위주의 '저항'…외교는 '실용주의'
현 정치권에서 가장 큰 문제로 지적받고 있는 것은 이른바 '진영 정치', '팬덤 정치'입니다. 정치는 대화와 설득, 타협을 통해 성과를 만들어내는 일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러한 것은 실종된 채 극단적 진영 논리만 난무하게 됐습니다. 상대방이 죽어야 자신이 사는 이른바 '죽고 죽이는 정치'가 횡횡해졌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각 당의 특정 정치인에 대한 '팬덤 정치'도 더욱 강화됐습니다. 급기야 강성 팬덤의 지지를 받는 정치인들은 지지층의 요구로 행보에 제약을 받는 상황이 돼 버렸습니다. 최근엔 민주당 내 22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경선을 계기로 강성 당원들의 반발이 잇따르며 '팬덤 정치'의 문제가 불거진 바 있습니다.
대통령에게 권한이 집중되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도 극심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2년 동안 국회에서 통과된 법안을 막는 이른바 재의요구권(거부권)을 10번 행사하며, 노태우 전 대통령 이후 거부권을 가장 많이 행사한 대통령이 됐습니다. 과거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 정치를 뛰어넘는 1인 지배 정치의 시대가 온 겁니다. 이러다 보니 집권여당 내부에서도 수직적 당정관계가 계속 문제로 지적 받았고,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 간 관계도 대화와 타협보다는 경쟁하는 구도가 지속됐습니다.
노 전 대통령의 경우, 국익을 위해서라면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 정책을 폈습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이라크 파병 등이 대표적입니다. 진보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된 노 전 대통령이었지만, 때로는 진보진영을 향해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2007년 2월17일 청와대 브리핑에서 '대한민국 진보, 달라져야 한다'는 제목의 기고를 통해 "진보가 진보 다우려면 미래문제에 보다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책임총리제를 실시하며 대통령의 권력을 분산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도 노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윤석열정부 출범 이후 외교안보 분야도 퇴행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미국 편중외교로 자주성과 국익은 실종됐습니다. 특히 미국에 기댄 외교 기조는 불필요한 지정학적 긴장과 대결을 자초했습니다. 중국과 러시아를 불필요하게 자극했고, 북한이 중국, 러시아와 더 밀착하는 계기를 만들어줬습니다. 일본에는 저자세 굴종외교로 일관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미국의 의도에 따라 일본과 밀착하느라 강제동원 배상과 후쿠시마 오염수 해양 방류 문제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보였음에도, 일본은 과거사에 대한 반성 없이 왜곡 교과서 발표나 야스쿠니 신사참배, 독도 망언을 거리낌 없이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이 균형자 역할을 하면서 동북아의 안정과 국익을 확보하자는 노 전 대통령의 '동북아 균형자론'과 비교하면 외교 역시 역주행하고 있습니다. 경제와 안보 부분에서 한국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중국과의 관계를 앞으로 어떻게 형성하느냐가 중요한 상황에서 노 전 대통령의 '동북아 균형자론'은 20년 가까이 시간이 흐른 지금 이 시점에 다시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지난 2004년 12월8일 노무현 대통령은 프랑스 공식 방문 일정을 마친 뒤 이라크 북부 아르빌 지역에 있는 자이툰 사단을 전격 방문해 이라크 평화 재건 활동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장병들을 격려했다. (사진=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제공)
'지방분권'부터 '복지국가'까지…끊임없는 노무현의 도전
주요 2개국(G2)인 미·중에 낀 한국 경제는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특히 미국에 편향된 윤석열정부의 외교 기조는 한국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미·중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정부는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을 의미하는 '안미경중' 과거 기조와 사실상 결별하며, 그 결과 대중 경제 협력이 대폭 약화됐습니다. 중국의 기술 굴기로 그동안 한국이 강세를 보였던 반도체와 배터리, 전기차 등 수출 주력 산업이 붕괴될 상황에 처했습니다. 또 현재 2% 내외의 장기 저성장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는 경고음도 커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또 사회적으로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대한민국은 갈등공화국'이란 말까지 나올 정도로 비화됐습니다. 지역주의도 여전합니다. 4·10 총선 결과를 보면 영호남 지역주의 골이 이번 총선에서도 그대로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나라가 동서로 쪼개져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까지 나왔습니다. 여기에 정치권의 대립은 세대와 지역, 젠더, 계층 간 갈등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경기침체 장기화로 인한 내수 부진은 일자리 격감, 소득 감소 등으로 이어져 중산층은 붕괴되고 서민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수도권 집중 현상이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면서 동시에 비수도권 지방은 대부분 지방소멸의 생존 위기에 빠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또 인구 감소로 국가의 미래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저출산·고령화 문제에 대해 정부가 별다른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서 참여정부는 2006년 8월 다양한 '복지 없는 성장은 불가능하다'며, 2030년까지 한국을 복지국가로 이끈다는 목표를 최초로 제시한 '비전 2030'을 발표했습니다. 여기에는 저출산과 고령화, 양극화 등 한국 사회 현안 문제 해결을 위해 방안이 담겼습니다. 기획예산처가 비전 전략에 맞춰 장기 재정운용 계획과 전망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정책의 실현 가능성을 구체화했습니다. 윤석열정부 들어 잇따른 정책 혼선이 빚어지는 것도 '비전 2030'과 같은 장기 계획이 없는 것과 무관치 않습니다. 야권 한 관계자는 "노무현 정신이 다시금 회자하는 이유"라고 말했습니다.
박주용 기자 rukaoa@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