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경기 파주시 접경지역에서 바라본 우리 군 초소와 북한 초소가 마주보고 있다. (사진=뉴시스)
[뉴스토마토 박주용 기자] 정부가 남북 간 충돌을 막는 최후의 안전핀인 '9·19 남북군사합의'에 대한 전부 효력 정지를 결정하면서 한반도 안보 지형이 격랑에 휩싸였습니다. 북한이 극도로 민감해하는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육상과 해상 등에서 군사적 충돌을 봉쇄하는 완충지대도 사라졌습니다. 사소한 오해나 실수로도 물리적 충돌까지 이어질 수 있는 위태로운 남북관계가 재현될 상황에 처하게 된 겁니다. 사실상 남북관계가 지난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이전으로 20년가량 후퇴하는 모양새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4일 정부가 국무회의에서 의결한 '9·19 남북군사합의 전부 효력 정지안'을 재가했습니다. 국방부는 윤 대통령 재가 후 즉각 브리핑을 열어 "9·19 군사합의에 의해 제약받아 온 군사분계선(MDL), 서북도서 일대에서 우리 군의 모든 군사활동을 정상적으로 복원하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정부는 9·19 군사합의 재개 시점을 '남북 상호신뢰가 회복될 때'로 정했지만, 이번 효력 정지 조치에 따라 윤석열정부 임기 내 복원은 어려울 전망입니다.
대북확성기·전방훈련 가능…"우발적 군사 충돌"
정부는 최근 오물 풍선 살포를 비롯해 북한의 복합적인 도발에 대응하기 위한 일환으로 9·19 군사합의 효력 정지를 강행했습니다. 윤 대통령은 이날 한·아프리카 정상회의 개회사에서 "북한은 작년 5월부터 지난주 초에 걸쳐 군사정찰위성을 네 차례 발사한 데 이어 각종 미사일 발사 시험을 계속하고 있으며 최근 며칠 사이에는 오물을 실은 풍선을 잇달아 우리나라에 날려 보내는 등 지극히 비상식적인 도발을 해오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9·19 군사합의는 2018년 9월19일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간 회담에서 채택한 '9월 평양공동선언'의 부속 합의로, 남북 간 일체의 적대 행위를 금지하는 내용이 핵심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9·19 군사합의 효력이 정지되면서 대북 심리전의 핵심인 대북 확성기 방송과 우리 군의 최전방 지역 군사훈련을 가로막는 법적 제약이 사라졌습니다.
이에 따라 2004년 이후 중단된 대북 확성기 방송을 바로 재개할 수 있게 됐습니다. 군이 보유하고 있는 40여개의 고정형·이동형 확성기는 접경지대에서 최대 30㎞까지 북한 체제의 실상과 한류 문화를 또렷하게 북측에 전파할 수 있습니다. 다만 대북 확성기 방송은 북한에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조치이기 때문에 향후 남북 간 확전의 빌미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일단 방송 재개를 위한 준비를 마친 뒤 북한의 추가 도발이 있을 경우 실행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옵니다.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각종 군사훈련도 재개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군사분계선 5㎞ 이내에서 대규모 실기동 훈련이나 포병 사격훈련 등이 이뤄질 수 있고 사격장도 다시 운영할 수 있습니다. 또 해상 완충구역이 사라지면서 북방한계선(NLL) 인근 해군 함정의 기동·포사격 훈련도 가능해집니다. 여기에 비행금지구역을 규정한 9·19 합의 1조3항의 효력을 정지하면서 공중 정찰 활동도 더욱 활발해질 전망입니다.
이외에도 비무장지대(DMZ) 내 감시초소(GP) 복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제거한 지뢰 재매설 등 접경지역의 경계 태세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남북의 오해나 오판에 따른 우발적 충돌 가능성이 높아진 겁니다.
조창래 국방부 정책실장이 4일 오후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에서 '9·19 군사합의 전부 효력 정지 결정'과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오물풍선→확성기→군사대응'…남북관계 악화일로
9·19 군사합의는 윤석열정부 출범 이후 남북 간 강대강 대치로 효력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정부가 북한의 군사정찰위성 발사에 대한 대응 조치로 지난해 11월22일 9·19 군사합의에서 우리 군의 대북 정찰 능력을 제한하는 일부 조항의 효력을 정지하자, 다음 날인 11월23일 북한은 9·19 군사합의에 구속되지 않겠다고 전면 폐기를 선언했습니다. 정부는 올해 1월 북한의 서해 북방한계선 인근 포사격에 대응한 서북도서 해병대 포사격 훈련을 제외하고는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자제했는데, 이번 조치들로 군사훈련도 현실화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윤석열정부 들어 남북관계는 더욱 악화됐습니다. 북한은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관계'로 선언하고 윤 대통령은 '힘에 의한 평화'를 강조하면서 남북은 '강대강 대치' 국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지속적인 미사일 도발에 정부의 맞대응만 반복될 뿐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9·19 군사합의 효력 정지로 대남 오물 풍선 살포→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남북 군사적 대응 순으로 악순환을 겪으며 남북 간 위기가 고조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본지와의 통화에서 "(군사합의 효력 정지로) 정세를 안정화시킬 기제가 상당 부분 제거된 상태여서 사실상 (남북이) 확전 경로로 들어갔다"며 "양측이 다 상대에 대해 응징적, 비례적으로 대응하겠다고 하고 있기 때문에 당분간 소강 상태로 접어들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진단했습니다.
박주용 기자 rukaoa@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