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메리어트 마르퀴스 호텔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퍼블릭포럼 인도·태평양 세션에서 미국 싱크탱크 허드슨연구소의 케네스 와인스타인 석좌와 대담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과거 미·소 대결 구도, 미·소 경쟁 체제하에서는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이 서로 완전히 분리해 자기 진영들끼리 경제 협력과 교역을 해왔다. 당시 미국과 소련의 교역규모는 전체 규모의 1%에 불과했다. 오늘날 미·중을 비롯해서 많은 글로벌 경제 선진국가들은 중국과 엄청난 규모의 무역과 경제협력을 하고 있고, 서로가 경제적 교류 없이는 굉장히 힘든 상황이다. 그래서 과거의 미·소 경쟁이 핵전쟁을 비롯한 전면전을 전제로 한 군사적 대결이라 한다면 지금 미·중 간에 이런 경쟁은 소위 전략경쟁이라고 해, 첨단과학기술, 그리고 하이브리드, 다양한 미디어와 가짜뉴스 공세에 대한 대응, 이런 것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하는 회색지대 경쟁이라 할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 참석차 미국 워싱턴DC를 방문 중이던 지난 11일(현지시간) 나토 퍼블릭포럼에서 연설한 뒤 "현재의 미·중 관계가 과거 냉전 당시 미·소 관계와 비교해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케네스 와인스타인 허드슨연구소 석좌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윤 대통령이 냉전 시대 미·소 관계와 일부에서는 '신냉전'이라고 규정하는 현재 미·중 관계에 대해 이렇게 정리된 답변을 내놓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지난 5년 사이 본격화된 미국의 대중 봉쇄정책은 마치 과거 소련에 했던 것처럼 중국이 미국 앞에 완전히 굴복하고 쓰러질 때까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제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적당히 잘 지내면서 모호한 외교를 펴는 것이 불가능해졌다."(2021년 여름, 김태효 성균관대 교수-현 국가안보실 1차장, '미·중 신냉전 시대 한국의 국가전략'논문)
"70년 전 시작된 냉전과 30년 전 시작된 탈냉전 시대가 그랬듯,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본격 개막한 신냉전 역시 대한민국이 선택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세계사적 흐름"(2023년 4월, 국회 국방위원회 국민의힘 간사 신원식 의원-현 국방부 장관)
윤 대통령의 이번 발언은 그의 핵심 외교·안보 참모인 김태효 차장이나 신원식 장관의 인식과는 큰 차이를 보여줍니다.
윤석열정부, 출범하자마자 미·일 '편향' 외교 줄달음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한·중 청년 대부분이 서로 싫어한다"며 '혐중' 정서를 선거에 활용, 한·중 협력에 선을 긋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윤석열정부는 미·중 갈등이 한층 격화되던 2022년 5월 출범하자마자 '전략적 선명성'을 내세우면서 '가치 외교'라는 이름 아래 미국과 일본으로 줄달음쳤습니다.
조 바이든(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해 11월 15일(현지시각)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인근 우드사이드의 파이롤리 에스테이트 내 정원을 걸으며 대화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갈등 일변도였던 미·중 관계에 2023년 들어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교역이 위축되면서 반도체 분야를 중심으로 미국 기업들이 고통을 호소했고, 유럽연합(EU)도 마찬가지였는데요. 3월에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중국에 대한 '디커플링'(탈동조화)에 반대한다며 '디리스킹'(위험 제거)을 들고 나섰습니다. 이어 6월에는 베이징을 찾아온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에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중국은 미국의 이익을 존중하며 미국에 도전하거나 미국을 대체하지 않겠다"고 하자 블링컨 장관은 "미국은 신냉전을 추구하지 않으며, 대만 독립을 지지하지 않으며, 미국과 충돌할 의사가 없다"고 화답했습니다.
미국·유럽, 중국에 "디커플링 아니라 디리스킹"
한국 내의 신냉전 인식과 달리, 바이든 정부의 외교·안보를 주도하는 블링컨 장관은 "중국도 미국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했고,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안보보좌관도 "중국에 대해 우리는 소련 붕괴와 같은 혁신적인 최종 상태를 기대하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윤 대통령은 올해 5월 '하나의 중국을 존중한다'고 말했는데요. 한·중·일 정상회담의 성사를 위해, 더 구체적으로는 리창 중국 총리의 방한을 성사시키기 위해 중국이 가장 민감해하는 사안에 대해 취임 이후 처음으로 직접 언급한 건데요. 가뜩이나 미·중이 갈등하는 상황에서 지난해 9월 러시아가 북한에 군사 기술 제공을 약속한 북·러 정상회담까지 열리면서, 한반도 상황 관리를 방치하고 있다는 비판이 커지면서 나온 발언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미·중 경쟁은 회색지대 경쟁"이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집권 2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미국과 중국이 상대를 죽이기 위한 존재론적 투쟁이 아니라 격차를 유지하거나(미국) 또는 따라잡기 위한(중국) 전략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현실을 인식한 것으로 보입니다.
말보다는 행동이 중요합니다. '트럼프 2기'가 현실화하면 미·중 갈등이 더 격해질 겁니다. 그때 과연 윤 대통령은 균형을 잡을 수 있을까요?
윤 대통령이 말은 바로 했지만, 그 장소가 나토 행사 자리였다는 점은 뒷머리를 무겁게 합니다. 나토는 시간이 갈수록 중국 겨냥을 더 분명하게 하고 있고, 미국은 IP4(인도·태평양 파트너 4개국, 한국·일본·호주·뉴질랜드)를 통해 나토와 아시아를 연결하려 합니다. 윤 대통령은 역대 한국 대통령 중 처음으로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했고, 올해까지 무려 3년 연속 참석했습니다.
전적으로 베트남·인도처럼 외교 하기는 어렵더라도…
분단 상황에서 미국과 군사동맹 관계인 한국이 전적으로 베트남 같은 '대나무 외교'를 하기도, 인도처럼 미·중·러를 자유롭게 넘나들기도 어렵습니다. 그렇다 해도 한·미 동맹을 축으로 하면서 중국과도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야만 합니다. 한국 기업계를 대표하는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SK그룹 회장)이 지난해 12월 "미국과 중국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전략을 펼치는 나라는 없다. 생존의 문제로 접근할 문제"라고 한 것도 이런 이유 아니겠습니까?
IP4는 이번 나토 정상회의에서 북·러 협력을 강하게 비판하는 공동성명을 처음 발표했습니다. 나토가 러시아뿐 아니라 중국의 위협을 동시에 강조하며 규탄한 데 비해, IP4는 중국을 의식해 북·러의 군사·경제 협력에만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hby@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