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뉴시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는 관세"라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관세를 '조자룡 헌 칼 쓰듯' 휘두르고 있다. 허공에다 휘두르는 것도 아니라고 상대가 있는 싸움에서 칼을 휘두르다 보면 자신도 다치기 십상이다.
애초 이 칼럼을 준비하면서 '트럼프가 전 세계를 상대로 한 관세전쟁을 지속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려 했다. 그런데 "관세 유예는 없다, 물러서지 않겠다"고 호호탕탕 큰소리를 치던 트럼프가 결국 밤사이에 물러섰다.
미국이 9일(현지시간) 국가별 상호관세를 시작한 지 13시간여 만에 그는 중국에 대한 관세는 125%로 올리는 한편 중국을 뺀 다른 국가들에 대해서는 상호 관세를 90일간 유예하고 10%의 기본 관세만 부과하겠다고 했다. 미국에 '관세 전면전'을 선언한 중국에는 관세율을 104%에서 21% 포인트를 더 높여 125%를 부과하는 한편, 고분고분한 한국과 일본 등 70여개국에 대해서는 한시적으로 관세율을 낮춘 것이다.
지난 2일 트럼프가 '해방의 날'(beration Day)이라며 발표했던 상호관세는 경제학적 근거 자체가 허약했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4년 해당국의 대미 무역흑자를 대미 교역액으로 나눠 백 만들고, 자기들 멋대로 그 반을 뚝 잘라서 상호관세율을 매겼다.
트럼프 1기 관세전쟁은 중국에 집중했다. 그래서 '미·중 무역전쟁'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185개국에 동시다발적으로 각각의 관세를 적용하고 있고 이중 보편관세 10%를 초과하는 상호관세를 부과하는 나라만 유럽연합(EU) 27개국을 포함해 총 86개국에 달한다. 관세부과 발표 전부터 전 세계 최대 소비대국인 미국 물가가 오를 거라는 예측은 너무 당연했고 화장지, 식용유 등 생필품은 대한 사재기 현상이 나타났다.
미 전역서 50만 시위대 '핸즈오프' 요구…트럼프팀 내부도 균열
트럼프에게 국정에서 '손을 떼라'는 '핸즈오프'(Hands Off)시위가 미 전역에서 벌어졌다. 연방 공무원 대폭 감축 및 연방 정부 조직 축소·폐지, 보건 프로그램에 대한 예산 삭감, 러시아에 대한 유화 기조 문제와 함께 '관세 전쟁'에 대한 반대 흐름이 폭발한 것이다. 지난 5일 미국 전역에서 50만명 이상이 참여한 가운데 1천200건 이상의 시위와 행진 등이 벌어졌고, 오는 5일 1일 노동절에는 이를 상회하는 시위가 벌어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트럼프가 "미국의 황금시대가 시작됐다"며 취임한 게 지난 1월 20일이었으니, 불과 석 달도 안 돼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트럼프 진영 내부도 흔들리고 있다. 테슬라 최고경영자로 정부효율부 수장인 일론 머스크와 이번 '상호 관세' 정책 설계자 격인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제조업 담당 고문이 공개 설전을 벌인 것은 상징적이다. 충돌 과정에서 머스크가 나바로를 거치지 않고 직접 트럼프를 만나 관세정책을 만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7일 '워싱턴포스트')는 보도도 나왔다.
트럼프 강성지지자이자 헤지펀드 억만장자인 강성 지지자인 빌 애크먼도 상호관세 발효일인 9일을 "경제적 핵전쟁(economic nuclear war)이 시작되는 날"이라고 규정하면서 "이러려고 트럼프에게 투표한 건 아니"라고 해 트럼프에게 큰 타격을 주기도 했다.
중국 강력 대응, 미국 125%에 84% 보복관세 맞불
뭐니 뭐니 해도 최대의 '적'은 역시 강력 대응을 선언한 중국이었을 것이다. 국무원 신문판공실은 9일 '중·미 무역관계 약간의 문제에 관한 중국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2만8000자짜리 백서를 통해 미국을 비판하면서 대미 보복관세 84%를 10일 정오에 발효할 것이라고 했다. 시진핑 주석은 리창 국무원 총리가 사회를 보고 정치국 상무위원 7명 전원이 참석하는 '주변공작회의'를 소집했다. 주변국 외교를 다루는 최고 레벨의 회의였다. 이전부터 미국을 압박해온 수단이었던 희토류도 적극 활용하고 있다. 미국 수입 희토류 중 70%를 생산하는 중국은 지난 4일 희토류 7종에 대한 수출 통제 조치를 발표한 데 이어 1·2차 가공 희토류를 국영 대기업으로 한정해 생산하도록 제한했다.
이런 난리 속에 미국 주식 시장에서는 4, 5일 단 이틀 만에 시가총액 6조6000억 달러(약 9652조원)가 사라졌다. 상원과 하원을 장악하고 있는 집권 공화당은 고민일 수밖에 없다. 테드 크루즈 공화당 상원의원(텍사스)은 "2026년은 (공화당에) 정치적으로 '피바다'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내년 11월 중간 선거를 걱정한 것이다. 미국 역사상 집권당이 중간 선거에서 승리한 것은 5번에 불과하다. 지난해 대선에서 거시경제가 괜찮았음에도 민주당 해리스가 패배한 것은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주요인이었다.
트럼프가 4월 2일을 '해방의 날'이라고 자신하자,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파멸의 날'(Ruination Day)이라고 비튼 것이 들어맞는 상황이었다. 결국 천하의 트럼프도 '상호관세 90일 유예'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트럼프는 9일 상호관세 발효 후 곧바로 시작된 국가별 맞춤형 무역협상에서 한국과 일본을 우선협상 대상으로 지목했다. 동맹국들 중에서도 안보의존도가 높아 다루기 쉽다는 점에서 협상 표본을 만들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한덕수 대통령권한대행 (사진=뉴시스)
한국, 대통령 공백 상황 '이점' 활용 '최대한 시간' 벌어야
그런데 한덕수 대통령권한대행은 8일 <CNN> 인터뷰에서 한국이 일본, 중국 등과 연합하여 미국 관세에 맞설 가능성이 있냐는 질문에 "우리는 그 길을 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경제 규모 2위 중국과 3위 유럽연합(EU)은 트럼프 관세정책에 맞서 연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왜 벌써 대응 카드 하나를 없애버리는 것인가? 지금은 가능한 모든 선택지를 확보하고 있어야 할 때 아닌가.
지금은 가능한 내용도 내용이지만 불과 56일 뒤에 새 대통령이 취임하는 상황에서 왜 권한대행이 이런 기본 전략 노선을 미리 정하는 것 자체도 큰 문제다.
'뷰티풀 잉글리시(Beautiful English, 훌륭한 영어)'칭찬 따위에 황송해하지 말고, 대통령이 공백이라는 '이점'을 활용해야 한다. 그렇게 가능한 최대한 미국과 협상은 물론 구체적 약속을 미루면서 시간을 벌어야 한다. 지금 급한 건 오히려 트럼프일 수 있다.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hby@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