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박주용 기자] 미군정 57호 법령에 따라 상당한 규모의 한국인들 사유 재산이 몰수됐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에선 피해자들의 현 실태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박정희정부의 한·일 기본조약(한·일 협정)에 따른 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1975년 7월 당시 극히 적은 금액을 보상받거나 또는 아예 보상을 받지 못한 피해자들이 10만명 가까이 됐지만 피해자들의 명단이나 피해 경위, 필요 보상 액수 등에 대해 정부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역대 모든 정부에서 직무를 유기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김광동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1월23일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열린 전체위원회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기재부도 외교부도 "모르겠다"…진실화해위까지 "우리 소관 아냐"
21일 본지가 기획재정부와 외교부, 행정안전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등 당시 대일청구권 보상과 관련이 있거나, 과거사 담당 업무를 맡고 있는 부처를 대상으로 미군정 57호 피해 실태 확인에 나섰지만, 모두 '모르겠다'는 답변으로 일관했습니다.
미군정 57호는 광복 직후 3년간 남한을 통치한 미 군정청이 1946년 2월21일 공포한 법령으로, 일본돈은 모두 지정은행에 예입해야 한다는 강제 법령이었습니다. 일본돈을 예입한 후 30년이 지난 후에야 일부 보상이 됐지만, 이마저도 극히 적은 액수였습니다.
당시 한·일 협정에 따른 대일 청구권 자금을 통해 미군정 57호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추진한 정부 부처는 재무부(현 기획재정부)였습니다. 이와 관련해 기재부 한 관계자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처음 들어본 내용"이라고 밝혔습니다. 또 다른 기재부 관계자도 "재무부 시절이면 너무 오래되기도 했고, 전혀 아는 게 없다. 처음 듣는 이슈"라고 전했습니다.
외교부에서도 미군정 57호 법령 피해 현황에 대해 "이 문제에 대해선 저희가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고 답했습니다.
과거사 진실 규명과 피해 지원을 담당하고 있는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에서도 "이 사건에 대한 정확한 내용은 모른다"고 밝혔습니다. 행안부 관계자는 "과거사도 여러 가지가 있다. 미군정 때도 있고 6·25 전쟁, 박정희정부 때도 있고 시기는 많다"며 "조사를 하면 결과 보고서를 진실화해위에서 결정한 다음에 소관 기관을 정해서 통보해준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다른 행안부 관계자도 "진실화해위 2기 때까지 누적으로 하면 최근에 한 것까지 (과거사 안건이) 2000건이 넘는다"며 "한 건 한 건 답변을 다 드릴 수 없다"고 전했습니다.
정부 관계자들에 따르면, 진실화해위에서 과거사 조사 안건을 정하면 관련 담당 부처로 조사 업무를 이관합니다. 진실화해위에서 미군정 57호 법령 피해 보상 안건에 대한 지시 내용을 따로 받지 않았다는 게 정부 관계자들의 입장입니다.
하지만 진실화해위에선 미군정 57호 피해 보상 안건은 금융·채권 사안이라는 점에서 본 위원회에서 담당하고 있지 않다고 해명했습니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미군정 57호 피해자 보상은 진실화해위 쪽과 관련이 멀어 보인다. 진실화해위 업무는 국가에 의한 인권 침해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관계자는 "(진실화해위는) 한국 전쟁 전후로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을 다루는 위원회다. 예를 들어 6·25 전쟁이라면 미군에 의해서 사망했다든지 상해를 입었다든지 이런 경우만 저희들이 신청을 받고 조사에 들어간다"며 "(미군정 57호) 피해자들이 (진실화해위에) 보상 문제를 신청했다면 각하했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1971년 2월24일자 조선일보 기사. (사진=조선일보 제공)
노무현정부도 실태 파악 '미흡'…정치권 "국가 책임지고 사과"
미군정 57호 관련 피해는 현 정부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역대 정부에서 이 사안에 대해 미온적인 대응을 보였습니다. 진실화해위를 처음으로 구성한 노무현정부에서도 미군정 시기 관련 피해 사례에 대해선 제대로 된 실태 조사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당시 노무현정부 청와대에서 활동한 핵심 관계자는 "(미군정 당시) 사안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았다"며 "진실화해위 구성을 어떻게 할지 그 정도 논의를 했다"고 전했습니다.
당시 미군정 57호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이 발견됐습니다. 일단 1975년도에 배상금의 5%만 지급했고, 배상금의 95%는 경제발전을 명분으로 당시 박정희정부에서 일괄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피해자들은 예치한 금액에 비해 턱없이 모자른 액수를 보상받게 된 겁니다.
또 일본돈을 예치한 사람은 보상받을 수 있도록 1971년 5월21일부터 1972년 3월20일까지 10개월간 재무부 장관에게 신고하도록 했는데요. 이와 같은 내용은 신문에 단 1번 공고됐습니다. 이 때문에 일부 피해자는 아예 보상 받지도 못했습니다. 이와 함께 일본돈을 예입할 당시 일본에 거주한 한국인들은 보상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정치권에서도 미군정 57호 법령에 따른 피해자들의 실태 조사 필요성을 언급했습니다. 국회 기재획재정위원회 야당 간사인 정태호 민주당 의원은 "(정부가 나서서) 실태 조사를 한번 해야 할 것"이라며 "억울한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국가가 책임을 지고 사과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박주용 기자 rukaoa@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