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프라임] 춘래불사춘, 그 사무침에 대하여

"농어촌 곳곳 잿더미인데 정신나간 삶의 질"

입력 : 2025-03-31 오전 10:03:56
[뉴스토마토 이규하 정책선임기자] "오랑캐 땅이라 화초가 없어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자연스레 허리끈 느슨해지니 몸매를 가꾸기 위함은 아니라네." 당나라 시인 동방규의 <소군원>에는 한나라 때 오랑캐 첩이 되는 궁녀 왕소군의 심경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다는 두 번째 구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은 흉노 땅에서 맞이한 그녀의 봄이 슬픔·절망 속에 얼마나 사무친 심정인가를 말해준다. 애절한 심정은 오늘날 봄 같지 않은 고약한 날씨로 비유되곤 한다.
 
부지깽이를 꽂아도 싹이 난다는 청명을 앞둔 어느 날. 완연한 봄이겠거늘 고심도 없이 외투하나 걸치지 않은 옷차림이 오한을 불러왔다.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도 깨어난다는 경칩이라면 늦은 한기가 그러려니 할 테다. 그러나 따스한 볕을 쬘 수 있는 낮의 길이가 더 긴 춘분을 훌쩍 지나 으슬으슬이라니.
 
 
봄 농사를 준비하는 절기 청명을 닷새 앞둔 30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꽃이 활짝 핀 목련 나무 위로 함박눈이 내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경악스러운 이상 저온 현상에 혀만 내두를 뿐이다. 봄보리를 간 농가에서는 담벼락을 고치고 들나물을 캐 먹는다지만 낮은 기온, 불안정 대기는 왕소군의 심정보다 더한 나날을 맞고 있다.
 
계속되는 강풍과 건조한 대기는 화마를 일으켰고 3월 말 일부 지역은 마른 하늘에 눈까지 내렸다. 기후변화가 불러온 대기 환경의 위기는 인간의 무지와 결합해 대규모 괴물 산불로 진화하는 등 농어촌 마을을 집어삼켰다.
 
기후변화로 인한 산불의 연중화, 대형화는 산불 추가경정예산(추경)안을 공식화하기까지 이르렀지만 화마가 휩쓸고 간 자리는 처참했다. '여의도 156개 면적 잿더미', 역대 최악으로 기록될 괴물 산불은 만성적인 장비·예산 문제와 더불어 제자리식 진화 시스템 등 전면적인 대수술을 지적하는 목소리로 경각심을 일깨웠다. 허나 우연이든, 필연이든 어떤 형태의 재앙과 고난이 닥쳐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식 폐해는 사그라지지 않는 듯하다.
 
더욱이 경남 산청에서 시작한 화마가 지리산국립공원까지 번진다는 보도가 연일 생중계되고 있던 지난 27일 한 부처의 정신 나간 행동은 빈축을 사기 충분했다. TV 속 산불 장면을 뒤로 농림축산식품부 기자실에 놓인 브리핑석 쪽엔 대형 인포그래픽이 설치되는 등 오전 브리핑 소식을 알렸다. "오늘 뭐 있나?" 다른 후배에게 물으니 "농어업인 삶의 질 향상 기본 계획 설명한데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산청 산불 발생 6일째를 맞은 지난 27일 지리산국립공원과 맞닿은 경남 산청군 구곡산에 난 산불이 마을쪽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그날따라 여러 부처를 도는 등 정신없이 바쁜 일정 탓에 제대로 브리핑 계획을 파악하지 못했던 탓도 있지만 농촌 산불 피해 관련 긴급 브리핑이겠거니 으레 짐작한 면도 있기에 내 머릿속은 더욱 혼잡스러웠다.
 
산불로 국토 절반이 난리인데 21개 부처·청 합동이 모여 농어업인 삶의 질 향상을 브리핑 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건지.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곤 하지만 그래도 중앙정부는 중심을 잡고 국민적 현안을 우선으로 현명한 처신을 할 줄 알았건만 순간 목이 멨다.
 
농식품부 농촌정책국의 공식 브리핑은 시작됐고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저마다 농지법, 빈집 문제, 세제 부분 등 관련 질문이 쏟아졌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느 기자는 여러 부처가 큰 정책을 준비하느라 고생했다는 말로 질문을 시작하는 통에 머리까지 곤두섰다. 지금 이 상황이 나만 이상하게 느끼는 건가. 평소 질문이 많은 나로서는 그날따라 애써 참으려 했다. 목구녕까지 차오른 경악성을 눌러 담으려 했다.
 
질의응답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를 무렵, 찰나의 침묵. 난 입을 열었다. 첫 일성은 "질문 안 하려고 했는데..." 였다. 기자가 질문을 안 한다니 있을 법한 얘기냐고 반문하겠지만 그만큼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는 방증의 표현으로 일단 미화해본다.
 
제5차 농어업인 삶의 질 향상 기본 계획은 브리핑이 있기 전인 24일 농어업인 삶의 질 향상 및 농어촌 지역개발 위원회가 심의·의결한 건이다. 
 
난 물었다. 아니 항언이 맞는 표현 같다. 24일 의결인데 4일째 지난 시점에 발표한 이유가 뭐냐고. 부처들 머리 맞대 농어촌 삶의 질을 높이겠다는 발표 타이밍이 적절한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정부 리더십이 부재하다고 감각이 결여됐다는 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한숨만 나온다면서도 격앙된 감정은 애써 억눌렀다. 노인이 돌아가시고 어촌 주민은 배 타고 마을을 탈출하고 다 타버렸는데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농어촌을 지금 운운하는 게 시기적절한 것이냐고 되물었다.
 
오히려 타버린 곳에 종자·농기구 등 물자 공급이나 농가 재해보험 선지급, 산불 피해 농업인의 농축산 경영자금 상환 연기 이자·면제 등과 관련한 브리핑을 하는 게 시기적으로 맞는 처사 아니냐고.
 
 
농림축산식품부는 27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제5차 농어업인 삶의 질 향상 기본 계획을 발표했다. (사진=뉴시스)
 
심의·의결한 정부 정책은 알려야 할 법적 기한과 맞닿아 있어 발표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적절한 발표 시점과 발표 방식의 방법론 등을 충분히 고려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미 삶의 질 위원회가 24일 의결했으면 산불이 지리산으로 확산되기 전 타이밍이 있었고, 백브리핑 등으로도 충분한 설명 기회가 됐을 것이다. 온통 화마에 휩싸였는데 대국민 정책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은 곱겠는가.
 
공교롭게도 해당국은 산불 관련 지원상황실까지 맡고 있는 요직이다. 그런 정책 부서에서 꺼내든 정신 나간 대국민 정책을 보고 있자니 슬픔·절망 속에 사무친 춘래불사춘 심정이 이런 기분인가 보다.
 
이규하 정책선임기자 judi@etomato.com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이규하 기자
SNS 계정 : 메일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