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유영진 기자]
삼성화재(000810)가 100% 자회사인 삼성화재서비스손해사정(이하 서비스손사)의 사내 노동조합 출범 이후 교섭을 고의로 지연하고 있다는 의혹이 일고 있습니다. 국회가 추진 중인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안(노란봉투법)' 통과에 앞서 자회사 노조 영향력을 억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커지는 상황입니다.
노조 출범 이후 협상 지연
12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서비스손사는 삼성화재가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삼성화재 상품 안내, 계약대출, 손사 상담 등 콜센터 업무를 비롯해 장기·일반보험 가입 고객의 신체·재산 등 보험사고에 따른 손해액과 보험금 산정 업무를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삼성화재 최대 규모 자회사입니다. 1996년에 설립됐고, 직원 수는 약 1800여명입니다.
서비스손사에는 그동안 노조가 없었지만 지난 3월 처음으로 '삼성화재서비스손해사정노동조합'이 출범했습니다. 노조는 출범 직후 △직무·직군 구분 없이 임금 인상률 6.9% 적용 △노조 홍보 등 기본 활동 보장 △노조 사무실 제공 △모회사와 동일한 기준의 초과이익성과급(OPI) 적용 등을 요구했으나, 사측이 대부분 거부하면서 협상이 지연 중입니다.
서비스손사 노사는 지난 4월29일 최소한의 노조 활동을 보장하는 기본합의 체결을 위한 교섭에 나섰지만, 사측이 노조의 기본 활동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협상이 지연됐습니다. 결국 이 사안은 중앙노동위원회의 중재를 거쳐서야 합의에 이르게 됐습니다.
임금협상 과정에서도 사측이 단체협상이 아닌 별도 계약 체결 방식을 고수하면서 갈등이 커졌습니다. 통상 노사가 단체협상을 통해 임금 인상률을 정하지만, 사측이 단체협상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노조의 교섭 권한이 사실상 무력화된 것입니다. 사측은 노조 출범 전부터 사내 '사원협의회'를 통해 임금 협상을 진행해왔다는 이유로 노조와 단체협상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노조는 교섭 일정이 다가오기 전 사측으로부터 임금 조정안을 통보받았습니다.
또한 삼성화재노조와 삼성화재애니카손사노조가 각각 독립된 노조 사무실을 갖고 있는 것과 달리 서비스손사 노조는 기본 사무실조차 제공받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에 단체협상에 나서야 할 인원들이 교섭일에 업무를 배정받으면서 인사 평가에 불이익을 받고 있습니다. 노조는 원활한 협상을 위해 교섭일에는 업무 배정과 인사 평가에서 제외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사측은 기존 방침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노조 측은 이를 사실상 협상 방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노조가 사측에 근로조건과 관련된 자료를 요청해도 제공이 미흡하고, 대표이사가 노조의 공문을 미개봉한 사례도 있습니다. 단체협상에서는 요구안 문구 하나하나에 대한 해설을 요청하는 등 시간을 지연하며 불성실 교섭을 하는 것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수차례 사측에 전달한 바 있습니다.
서비스손사 노조 관계자는 "회사는 노조 요구안에 대해 '법조항 외 수용 거부'를 고수하고 있다"며 "이는 회사가 노동조합과 단체협약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어 "회사가 일방적으로 정한 '취업 규칙'을 노동조합에 강요하면서 협상을 지연하고 있다"며 "과거 무노조 경영을 했던 기조가 아직도 이어오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무노조 경영은 삼성그룹이 노동조합 없이 회사를 운영하려는 경영 방침을 의미합니다. 과거 삼성그룹이 대대적으로 추진했던 무노조 경영은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하고, 노조를 통한 권익 보호를 어렵게 한다는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실제로 삼성은 노조 활동을 조직적으로 방해하거나 탄압했다는 이유로 사법부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례도 있습니다.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이재용
삼성전자(005930) 회장은 2020년 무노조 경영 폐지를 공식 선언한 바 있습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삼성화재, 자회사 노사 협상 방해 의혹
일각에서는 삼성화재가 서비스손사 노사 간 단체협상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키며 배후 조종하고 있다는 시각도 나옵니다. 그 배경에는 최근 빠르게 논의되고 있는 노란봉투법이 있는데요. 이 법이 시행되면 노조의 권한이 크게 강화될 수 있어 삼성화재가 이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협상을 늦추고 노조 영향력을 억제한다는 것입니다.
노란봉투법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2조와 제3조를 개정하는 것을 골자로 합니다. △근로자 및 노동조합 가입 대상의 확대 △사용자 범위 확대 △노동쟁의 개념 확대 △노동조합의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책임의 면제·제한 등 쟁의행위를 보다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사용자 범위 확대'는 근로자의 근로조건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거나 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자도 사용자로 간주하는 내용입니다. 현행법상 쟁의행위는 근로계약 관계에 있는 '직접 고용한 자'를 상대로만 할 수 있습니다. 서비스손사 근로자는 서비스손사에 대해서만 교섭 요청과 쟁의행위를 할 수 있다는 뜻인데요. 노란봉투법이 시행되면 삼성화재 하청 역할을 하는 서비스손사 근로자들이 원청인 삼성화재를 상대로 교섭을 요청할 수 있고, 삼성화재가 교섭을 거부하면 쟁의행위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현행법상 결정 내용에 대해서는 쟁의행위를 할 수 없고, 근로조건을 결정하는 과정 자체에 대해서만 쟁의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노란봉투법은 쟁의행위 대상을 '근로조건의 결정'에서 '근로조건'으로 확대해 임금 혹은 정리해고 등 근로 조건에 대해 노동자가 쟁의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근로자의 손해배상 책임도 제한되면서 쟁의행위의 부담을 줄여 노조가 더욱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습니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노란봉투법이 시행될 것을 우려해 회사가 노조를 미리 견제하려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면서 "서비스손사 단체협상이 지연되는 것도 같은 맥락일 수 있다"고 전했습니다. 이어 "법안이 최종 통과되면 삼성화재는 자회사 노사 관계에 성실히 임할 필요가 있다"고 부연했습니다.
사진은 삼성화재서비스손해사정 사측과 노조가 지난 4월 한국노총빌딩에서 2025년 단체교섭 상견례를 진행하는 모습. (사진=삼성화재서비스손해사정 노동조합 제공)
유영진 기자 ryuyoungjin1532@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