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프라임]추운 겨울, 그리고 귤의 추억

입력 : 2025-12-03 오후 3:13:12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뉴스토마토 강영관 기자] 귤을 까는 냄새는 내게 언제나 제주 겨울을 떠올리게 한다. 방 안 가득 퍼지는 상큼한 향은 마치 오랜 친구의 목소리처럼 익숙하다. 손가락 끝에 남는 귤 향을 맡으면 제주도 남쪽 남원읍 위미리 외갓집의 겨울이 느릿하게 되살아난다. 어린 시절 겨울방학 때 반강제로 '외갓집 한달살이'를 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멀리 서귀포 바다와 함께 마당 앞 귤밭이 눈앞에 펼쳐졌다. 바람이 날카로운 계절, 따뜻한 방 안에서 외할머니는 귤을 쟁반에 가득 담아 귤 하나를 반으로 갈라주셨고, 방바닥엔 귤껍질이 쌓여갔다. 그 모든 것들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하나의 장면처럼 선명하게 돌아온다.
 
제주의 겨울은 언제나 귤빛과 귤나무가 함께 있었다.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겨울 햇살은 차갑지만 또 따뜻했다. 그리고 한라산은 늘 멀리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겨울이면 산 정상이 흰색을 두르고, 낮은 구름이 걸려 있었다. 마당에서 고개를 들어 북쪽을 바라볼 때마다, 산은 제주의 모든 시간을 품고 있는 듯 느꼈다.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같은 산을 바라보고 있었음을 생각했다. 귤나무, 한라산, 바람과 구름. 그 시절의 제주는 그렇게 자연과 사람, 계절과 일상이 분리되지 않은 채 얽혀 있었다.
 
세월이 흘러 다시 찾은 제주도 귤밭은 어딘가 낯설었다. 외할머니는 세상에 계시지 않았고, 외갓집 귤밭은 잘 가꿔진 정원으로 바뀌었다. 이웃집 귤나무는 그대로 있었지만 어린 시절 바람과 흙 냄새는 더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추억 속의 제주는 빛이 조금 더 따뜻했고, 바람은 조금 더 느렸으며, 귤의 향은 훨씬 진했다. 한라산은 여전히 묵묵히 서 있었지만, 내가 떠나온 시간의 틈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나 달라진 풍경 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나에게 귤은 여전히 시간의 냄새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귤을 손에 쥐고 껍질을 벗기는 순간, 기억은 한라산 자락까지 길을 되짚듯 달려갔다. 마당의 흙바닥, 저녁 무렵의 바람, 돌로 만들어진 창고에 차곡차곡 쌓인 노란 상자들. 잊힌 줄 알았던 감각들이 다시 살아난다. 사람의 기억은 사진처럼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향기와 온도, 빛의 움직임 속에 숨어 있다가 문득 꺼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설 명절엔 언제나 제주를 찾지만, 더는 외갓집에 가는 일은 없다. 본가인 제주시에서 바라보는 한라산은 북쪽 단면이 아닌 남쪽 단면이다. 한라산 정상에는 여전히 눈이 쌓여있지만, 서귀포에서 바라보는 산의 정상과는 사뭇 다르다. 다만 그 풍경을 마주할 때면, 마치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서로 손을 맞잡는 기분이 든다. 나는 더는 어린아이가 아니고 청년을 넘어 중년이 됐지만, 제주 겨울을 바라보는 마음만큼은 여전히 그 시절에 머물러 있다.
 
한라산의 흰빛과 귤의 주황빛이 만나는 풍경은 그래서 나에게 단순한 자연의 조합이 아니다. 그곳에는 내가 잃어버린 시간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귤을 까는 향기만으로도 심장이 조금 따뜻해지는 이유는 아마도 그 향기 안에 제주의 겨울 햇빛, 그리고 지나간 시절의 나 자신이 머무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주의 귤빛 겨울은 이제 매일 함께하는 풍경이 아니지만 내 마음속에선 여전히 아름다운 계절로 남아 있다. 한라산이 멀리서 묵묵히 지켜보던 그 시절처럼, 그 계절의 추억은 지금도 내 삶을 조금 더 단단하게 붙들어준다.
 
 
강영관 기자 kwa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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