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불을 다루기 시작한 순간은 문명의 기원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결정적 장면이 우리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약 40만년 전, 오늘날 영국 남부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네안데르탈인 또는 그와 매우 가까운 인류 집단이 황철석과 부싯돌을 이용해 의도적으로 불꽃을 만들어 캠프파이어를 피웠다는 명확한 증거가 처음 확인됐습니다.
이 연구는 12월10일 국제 학술지 <네이처(Nature)>에 발표됐으며, 고고학계에서는 ‘불 사용’을 넘어 ‘불 제작(fire-making)’의 기원을 다시 써야 할 발견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네안데르탈인이 최초로 불을 만들어 사용했다는 증거가 발견된 영국 남부 서퍽주 반햄 유적지의 발굴 현장. (사진=뉴시스)
자연의 불 아닌, ‘의지로 만든 불’
이번 발견은 영국 서퍽주의 반햄(Barnham) 유적에서 이뤄졌습니다. 이곳은 초원과 숲이 맞닿고 물웅덩이가 형성된 환경으로, 구석기 석기 유적으로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습니다. 연구진은 이 지역에서 부싯돌과 황철석(pyrite)을 반복적으로 마찰해 생긴 불꽃의 흔적, 고온에 여러 번 노출된 점토 퇴적층을 함께 확인했습니다.
영국박물관의 고고학자 닉 애슈턴(Nick Ashton)은 “이 유적을 처음 마주했을 때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며 “이는 인류 사회의 작동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순간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했습니다.
지화학 분석 결과, 해당 퇴적층은 700도 이상의 고온에 반복적으로 가열된 흔적을 보였습니다. 이는 번개나 산불 같은 자연 화재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패턴입니다. 특히 황철석은 반햄 인근 지질 환경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 광물로, 누군가 의도적으로 외부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 결정적 단서가 됐습니다.
지금까지 고고학계는 인류가 불을 사용한 시점을 약 100만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추정해왔습니다. 케냐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호모 에렉투스가 남긴 불 사용 흔적이 발견됐고, 이스라엘 북부의 한 유적에서는 약 78만년 전의 화덕 흔적도 확인됐습니다. 그러나 이들 사례에서는 불을 ‘어떻게 얻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불씨를 옮겨 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반햄 유적은 불꽃을 만들어내는 도구와 불에 탄 흔적이 함께 발견된, 현재로서는 가장 오래된 ‘불 제작’의 증거입니다. 이전까지 알려진 가장 이른 사례는 프랑스 북부에서 발견된 약 5만년 전 네안데르탈인의 흔적이었습니다. 이번 발견으로 그 시점은 무려 35만년 이상 앞당겨졌습니다.
네덜란드 라이덴대의 고고학자 마리 소레시(Marie Soressi)는 “필요할 때 불을 언제든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능력”이라며 “이는 인류 진화에서 게임 체인저에 해당한다”고 평가했습니다.
영국 반햄 유적지에서 발견된 황철석 파편. (사진=뉴시스)
불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밤의 어둠을 밝히고 맹수를 쫓아냈으며, 사람들이 모여 교류하는 사회적 공간을 만들어주었습니다. 특히 음식 조리는 독소를 줄이고 저장성을 높였으며, 소화에 필요한 에너지를 크게 낮춰 뇌 발달을 촉진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불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은 곧 생존 전략의 질적 도약을 의미했습니다.
불이 만든 진화의 가속 페달
이번 연구는 네안데르탈인들이 단순히 환경에 적응한 존재가 아니라, 기술을 통해 환경을 적극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캐나다 사이먼프레이저대의 고고학자 데니스 샌드게이트(Dennis Sandgathe)는 “나는 초기 불 제작 주장에 다소 회의적인 편이었지만, 불의 잔해와 황철석이 이렇게 밀접하게 함께 발견된 사례는 매우 설득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연구진은 이 불 제작 흔적이 비교적 따뜻한 간빙기(interglacial period)에 해당한다고 설명합니다. 반햄 유적에서는 인골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지만, 지층의 연대와 석기 양식으로 볼 때 초기 네안데르탈인 또는 그 직계 집단이 주인공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불 제작 기술이 이후 인류 집단에 널리 퍼졌는지는 아직 불분명합니다. 당시 인구 밀도가 극히 낮았던 만큼, 기술이 발명됐다가 사라졌을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소레시는 “한 번 발명된 기술이 반드시 연속적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애슈턴은 낙관적입니다. “우리는 늘 초기 인류의 능력을 과소평가해왔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증거가 나타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40만년 전, 어둠 속에서 튄 작은 불꽃 하나. 그 불씨는 인간과 그 친족들이 자연에 종속된 존재에서, 자연을 다루는 존재로 나아가는 결정적 순간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