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은 여전히 한국인의 사망 원인 1위입니다. 다행히 암은 조기에 발견할수록 치료 성과가 크게 향상되는 질병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조기 발견 자체가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현재 암 진단은 영상 검사나 조직 검사, 혈액 검사 등 병원을 방문해야 가능한 절차가 대부분이며, 비용과 시간 부담은 물론 신체적 고통도 적지 않습니다.
임신 테스트기처럼 간단한 검사로, 집에서 암을 조기에 알아낼 수 있는 날은 올 수 있을까. 최근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과 마이크로소프트 연구진이 국제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Nature Communications)>에 발표한 논문 ‘딥러닝 기반 프로테아제 기질 설계(Deep learning guided design of protease substrates)’는 이런 질문에 한 걸음 더 다가선 연구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연구의 핵심은 인공지능(AI)이 설계한 ‘단백질 조각’입니다.
인공지능이 생성한 펩타이드로 코팅된 나노입자. 체내에 암 관련 프로테아제가 존재하는지를 알려주는 센서 역할을 할 수 있다.(이미지=MIT)
인체 속 ‘분자 가위’ 프로테아제
우리 몸에는 단백질을 자르는 효소가 존재합니다. 프로테아제(protease)로 불리는 이 효소는 말 그대로 단백질을 절단하는 ‘분자 가위’ 역할을 합니다. 세포 신호 전달과 염증 반응, 조직 재생 등 정상적인 생명 활동에 필수적이지만, 동시에 각종 질병과도 깊이 연관돼 있습니다.
인간 유전체에는 약 600종의 프로테아제가 암호화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암세포에서는 일부 프로테아제가 비정상적으로 과활성화된(overactive) 경우가 많습니다. 암세포가 주변 조직을 침범하고 다른 장기로 전이하기 위해서는, 세포를 지탱하던 단백질 구조물을 분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MIT의 산게타 바티아(Sangeeta Bhatia) 교수 연구팀은 10여년 전부터 이 점에 주목해왔습니다. 연구진은 “암세포는 흔적을 남기며, 그 흔적 중 하나가 과활성화된 프로테아제”라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바티아 연구팀이 제시한 접근법은 단순하면서도 혁신적입니다. 특정 프로테아제에 의해 잘려 나가도록 설계된 단백질 조각, 즉 펩타이드를 인체에 투여하는 것입니다.
연구진은 짧은 단백질 조각인 펩타이드를 나노입자 표면에 코팅했습니다. 이 나노입자는 머리카락 굵기의 수만 분의 1에 불과할 만큼 미세해, 연구 단계에서는 삼키거나 흡입하는 방식으로 체내 전달이 가능하도록 설계됐습니다. 만약 몸속 어딘가에 암이 존재하고, 해당 암이 특정 프로테아제를 과도하게 분비하고 있다면, 그 효소는 나노입자에 붙은 펩타이드를 절단하게 됩니다.
잘려 나온 펩타이드 조각은 혈액을 거쳐 소변으로 배출됩니다. 이 신호는 임신 테스트기와 유사한 종이 스트립 형태의 센서로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병원 장비 없이도, 집에서 간편하게 암의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셈입니다.
연구진은 실제로 이 방식이 실험동물에서 폐암과 난소암, 대장암을 감지하는 데 효과적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신호가 검출됐다’는 사실만으로는 어떤 암인지, 어떤 효소가 작용했는지를 정확히 구분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남아 있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어떤 펩타이드를 사용할 것인가였습니다. 프로테아제의 종류는 매우 많고, 하나의 펩타이드가 여러 효소에 의해 동시에 절단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신호를 감지하더라도 그 의미를 정확히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기존 연구에서는 연구자들이 시행착오를 거쳐 펩타이드를 하나씩 시험해왔습니다. 그러나 펩타이드는 보통 10개의 아미노산으로 구성되며, 가능한 조합은 약 10조가지에 이릅니다. 인간의 실험 능력만으로 이 모든 경우를 검증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공지능이 해결책으로 등장했습니다.
클리브넷이 설계한 단백질 펩타이드를 이용해 암을 초조기에 자가 진단할 가능성에 한 걸음 다가서게 되었다. (이미지=Gemini 생성)
AI가 단백질을 설계하다
MIT와 마이크로소프트 연구진은 이번 논문에서 ‘클리브넷(CleaveNet)’이라는 새로운 인공지능 시스템을 공개했습니다. 클리브넷은 특정 프로테아제가 어떤 단백질을 자를지 예측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해당 효소에 의해 효율적이고 선택적으로 절단될 단백질을 직접 설계하는 AI입니다.
작동 원리는 거대언어모델과 유사합니다. 언어 모델이 문장의 다음 단어를 예측하듯, 클리브넷은 아미노산 서열의 다음 위치를 예측하며 ‘의미 있는 단백질 문장’을 생성합니다. 연구진은 약 2만 개의 펩타이드와 다양한 프로테아제 간 상호작용 데이터를 AI에 학습시켰습니다.
클리브넷은 두 단계로 작동합니다. 먼저 생성 모델이 특정 효소에 적합한 펩타이드 후보를 만들어냅니다. 이어 예측 모델이 해당 후보가 실제로 얼마나 효율적이고 선택적인지를 점수로 평가합니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AI는 인간이 접근하기 어려운 최적의 설계를 찾아냅니다.
연구진은 AI 설계의 효과를 검증하기 위해 MMP13이라는 프로테아제에 주목했습니다. MMP13은 암세포가 주변 조직을 분해하고 전이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효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클리브넷이 설계한 펩타이드는 실험실 테스트에서 MMP13에 대해 매우 높은 선택성과 효율성을 보였습니다. 특히 이 펩타이드들은 AI 훈련 과정에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아미노산 서열이었습니다. 연구진은 “AI가 기존 지식을 단순히 재조합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설계를 제안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 연구가 주목받는 이유는 암 조기 진단의 문턱을 획기적으로 낮출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AI로 설계된 펩타이드를 활용하면, 특정 암에서만 활성화되는 프로테아제를 정밀하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여러 효소 신호를 조합해 해석할 경우, 암의 종류까지 구분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려 있습니다.
현재 바티아 연구팀은 미국 보건고등연구계획국(ARPA-H)의 지원을 받아 약 30종의 암을 가정용 검사 키트로 감지하는 기술을 개발 중입니다. 연구진의 목표는 병원을 찾기 이전, 증상이 나타나기 이전 단계에서 암을 포착하는 것입니다. 임신 테스트기처럼 간단한 암 진단이 언젠가 현실이 될 수 있을지, 연구진의 후속 연구에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서경주 객원기자 kjsuh5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