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토마토 강석영 기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재판 개입 혐의가 법원에서 인정됐습니다. 2018년 사법농단 의혹이 불거진 지 8년 만입니다. 그러나 정작 사법행정 개혁의 핵심인 법원행정처 폐지 법안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민주당은 최근 법원 판결을 비판할 때마다 '조희대 사법부'라며 조희대 대법원장의 재판 개입 가능성을 언급하면서도, 구조적 해결책인 법원행정처 폐지엔 미온적입니다. 법조계에선 대법원장의 재판 개입을 막기 위해 법원행정처를 폐지하고, 비법관이 다수를 차지하는 사법행정위원회를 신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큽니다.
서울고법 형사14-1부(재판장 박혜선)는 지난달 30일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등 혐의로 기소된 양 전 대법원장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습니다. 함께 재판에 넘겨진 박병대 전 대법관(전 법원행정처장)도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에 처해졌습니다. 고영한 전 대법관(전 법원행정처장)은 무죄가 나왔습니다.
'사법농단' 의혹을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달 30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직권남용 권리 행사 방해 혐의 2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
재판부가 유죄로 인정한 양 전 대법원장의 재판 개입 사건은 △한정위헌(심판 대상이 된 법률 조항 자체는 그대로 둔 채 해당 법률조항에 대한 특정한 해석·적용은 위헌임을 선언하는 헌법재판소의 결정) 취지의 위헌제청결정 사건 △통합진보당 국회의원 행정소송 항소심 사건 등 2건입니다. 두 사건 모두 헌법재판소와의 권한 다툼에서 대법원이 우위를 점하기 위해 벌어진 일입니다.
앞서 서울남부지법 민사11부는 2015년 4월 사립학교 교직원연금법 관련 재판에서 한정위헌 취지의 위헌법률심판제청을 결정했습니다. 한정위헌은 법원이 내린 법률 해석이 위헌인지 헌재에 판단을 구하는 절차로, 헌재가 법원 판단을 뒤집을 수 있어 대법원으로서 예민하게 반응하는 지점입니다. 이에 법원행정처는 해당 재판부에 연락해 한정위헌 대신 단순위헌 여부를 물으라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통합진보당 국회의원 행정소송 항소심 재판 개입도 대법원이 주도권을 확보할 목적에서 벌어졌습니다. 2014년 12월 헌재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김재연 진보당 대표 등이 국가를 상대로 낸 국회의원 지위 확인 소송을 냈습니다. 1심이 각하 판결을 내리자 법원행정처는 2심 재판부에 본안 판단을 하라는 문건을 보내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헌재 결정과 별개로 국회의원 지위 확인은 법원의 고유 권한이라는 입장을 관철하려 한 겁니다.
재판부는 양 전 대법원장의 전체 혐의 47개 중 이러한 2개 혐의만 유죄로 인정했습니다. 양형사유에서도 '그간 양 전 대법원장이 사회적 비난에 노출됐다'며 집행유예를 선고했습니다. 전형적인 솜방망이 처벌입니다. 다만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죄의 범위를 넓혀서 해석한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그간 재판 개입 의혹 재판에서 법원은 '대법원장 등에게 재판에 개입할 권한 자체가 없으므로 권한 남용도 성립하지 않는다' 논리로 양 전 대법원장을 비롯해 관련 법관들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하지만 양 전 대법원장 2심 재판부는 양 전 대법원장이 사법행정사무를 집행하는 외관을 갖췄으나 실질은 재판에 개입했다고 판단, 직권남용죄를 인정했습니다. 이번 판결로 대법원장의 재판 개입을 처벌할 근거가 마련됐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구조적으로 대법원장의 재판 개입 가능성을 뿌리 뽑기 위해 법원행정처를 폐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대신 비법관이 절반 이상 참여하는 사법행정위원회를 신설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습니다. 법원행정처 폐지는 사법농단 이전부터 오랫동안 논의됐던 방안입니다. 대법원장이 사법행정권을 전적으로 행사하는 구조를 깸으로써 제왕적 대법원장제도를 타파하자는 취지였습니다.
2018년 사법농단 직후 사법행정제도를 개편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뜨거웠습니다. 하지만 열기는 금세 사그라들었고, 법원행정처 폐지안은 여야 공방 속에 폐기됐습니다. 이후 대법원은 대법원규칙으로 사법행정자문회의(법관 위원 5명·비법관 위원 4명)를 설치했습니다. 사법행정의 민주성을 꾀한 자체 개혁안이었지만, 대법원장이 부의한 제한적 사항을 자문하는 기구에 그쳤습니다. 이마저도 한동안 개최되지 않았고, 사법행정자문위원회로 바뀐 지금도 중단된 상태입니다.
도리어 법원행정처는 비대화되는 중입니다. 2021년 법원행정처는 33명에서 12명까지 인원을 줄였지만, 조 대법원장이 취임한 이후엔 24명으로 다시 늘어났습니다. 현재 법원행정처는 2018년과 유사한 모습입니다.
국회에서 사법개혁 관련 논의는 다시 뜨겁습니다. 민주당은 지난해 5월 이재명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이 대법원에서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된 이후 대법관 증원 등 7대 사법개혁안을 내놨습니다. 하지만 법원행정처 폐지안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현재 법원행정처 폐지를 담은 법원조직법 개정안은 조국혁신당 발의안이 유일합니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민주당은 조 대법원장이 지귀연 재판부에 ‘윤석열 감형하라’고 영향을 미칠 구조를 그대로 두고 있는 셈”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강석영 기자 ksy@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