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마Ⅱ(은퇴한 사람들의 해외 마을 만들기)는 단순한 은퇴자 주거 모델이 아닌, 초고령 사회와 기후위기 시대에 국가와 개인이 함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설계하는 새로운 국가 전략입니다. 해외 거점에 형성될 은퇴자 커뮤니티는 항공·관광·헬스케어·부동산 산업을 잇는 신수요를 만들고, 동시에 한국 기업과 스타트업의 교두보가 됩니다. 거점도시는 결국 한국형 개발협력(ODA), 글로벌 공급망 전략, 문화 교류의 실제 인프라가 됩니다. 은사마Ⅱ의 1차 거점은 라오스 비엔티안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두 도시 거주자들의 기고를 통해 이 전략의 향후 전개 방향을 살펴봅니다. 본 기획에서는 한국 기업의 극동 러시아 진출 교두보이자 항만·물류·관광·에너지 산업이 교차하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펼쳐지는 한러·유라시아 교류의 현장을 함께 들여다봅니다. (편집자 주)
지난 글에서 저는 러시아와 한국이 1990년대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를 함께 극복해 나간 순간과, 양국 간 신뢰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극동의 기적'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21세기 초반으로 접어들면서 한국 기업들이 러시아에 가져다준 것이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기업 문화 그 자체였다는 이야기를 드리고자 합니다.
초창기 한국이 가져온 가전제품, 자동차, 식품, 의약품 등 눈에 보이는 상품들은 단기간 내 러시아 국민들에게 큰 사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인들이 전한 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고 다루는 방식, 즉 기업 문화라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현대자동차 러시아 생산공장. (사진=모스크바 타임스)
특히 건설과 제조업 현지화 분야에서 한국 기업의 모습은 다른 외국 기업들과 분명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공기와 납기는 건설·제조업에서 사업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공기는 공사가 완료되기까지 걸리는 전체 기간을 의미하고, 납기는 계약된 제품이나 설비를 정해진 시점까지 공급해야 하는 기한을 뜻합니다. 하지만 인허가 지연, 물류와 통관 문제, 환율 변동에 따른 원가 상승 등 불안정한 경영 환경 속에서 공기와 납기가 지연되고 비용 손실이 발생하는 일이 흔했습니다.
많은 외국 기업들은 초기 계약 단계부터 리스크를 러시아 측이 부담하지 않으면 사업 자체를 시도하지 않거나, 사업 진행 중에도 분쟁 조항을 내세워 공사를 중단하고 추가 비용을 요구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사업을 백지화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국 기업들은 달랐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계약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밤을 새워서라도 약속한 기한을 맞추려 했고, 기업 이익이 줄어드는 상황에서도 '약속은 약속'이라는 자세로 현장을 지켜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러시아 파트너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 같은 책임감은 공사와 납품이 끝난 이후에도 이어졌습니다. 한국 기업의 사후관리 문화는 단순한 서비스가 아니라 신뢰의 연장선이었습니다. 문제가 발생하면 언제든 찾아와 해결하려 했고, 한국인 특유의 정과 관계 중심의 태도가 비즈니스 문화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러시아 사람들에게 하나의 문화적 특징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습니다.
정치·경제 환경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오랜 기간 불안과 결핍을 겪어온 러시아 사람들도 점차 마음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무뚝뚝한 태도 뒤에 숨겨져 있던 인간적인 교류가 살아났고, 한국인과의 관계 속에서 웃음을 나누고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진정한 우정을 쌓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양국 파트너들이 밤새 보드카와 소주를 나누며 관계를 다졌던 기억도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이 시기부터 건설과 제조 현장 곳곳에는 중장비, 사출기, 엘리베이터, 보일러, 공조 시스템 등 도시와 공장을 움직이는 핵심 설비에 한국산 제품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한국식 유지보수와 사후관리 시스템도 러시아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며 더 깊이 자리 잡았습니다.
한국 기업과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쌓이면서 러시아인의 한국 방문도 빠르게 증가했습니다. 특히 2014년 발효된 한·러 상호 무비자 방문 협정은 양국 교류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극동 러시아 시민들에게 서울과 부산은 꼭 한번 가보고 싶은 도시가 되었고, 인천공항과 김해공항은 세계로 나아가는 관문이자 매력적인 경유지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존에서 판매 중인 러시아 생산 '도시락(Doshirak)' 라면 제품. 한국식 즉석라면 브랜드가 현지생산을 통해 러시아 소비시장에 자리 잡은 사례로 꼽힌다. (이미지=아마존)
처음에는 백화점과 마트, 시장을 찾아 생필품과 기호품을 구입하고 한국 식당에서 불고기와 갈비, 삼겹살을 즐기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패션, 화장품, 놀이시설 등 한국의 문화 소비 전반으로 관심이 확대되었습니다.
무비자 협정 이후에는 정기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한국을 찾는 러시아 중산층이 크게 늘었고, 이들을 위한 통역 인력도 국내 대형 병원에 상시 배치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의료 서비스의 속도와 청결, 친절함, 그리고 사후관리까지 경험한 러시아 사람들은 치과, 안과, 피부과, 성형외과 등 다양한 분야로 의료 방문을 확대했습니다. 그 결과 한때 한국 의료기관을 찾는 외국인 중 러시아인이 가장 많다는 보도도 이어졌습니다.
한국 속담에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값싼 항공료와 짧은 이동 시간 덕분에 한국을 다녀온 극동 러시아 시민들은 자신의 경험을 가족과 지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전했습니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알마티, 타슈켄트, 나아가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까지, 전화와 입소문을 통해 전해진 한국에 대한 경험은 강력한 홍보 효과를 만들어냈습니다.
그 영향으로 장시간 비행과 높은 항공료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꼭 방문해보고 싶다는 수요가 유라시아 전역으로 확산됐습니다. 극동 러시아 시민들은 한국 문화에 매료되며 자연스럽게 한국을 알리는 자발적 홍보자 역할을 하게 됐습니다.
이러한 흐름을 보면 우리가 이 관계를 더욱 소중히 이어가야 할 이유도 분명해집니다.
지금까지는 과거의 공통 경험을 중심으로 돌아보는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다음 글부터는 현재와 가까운 미래를 살아가는 극동 러시아인의 시선에서, 한국과 함께 만들어갈 기대와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유리 시바첸코 루스퍼시픽그룹 컴퍼니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