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조아름기자] 근저당권 설정비 반환을 놓고 처음 패소한 시중은행이 강력한 항소 의지를 나타냈다. 해당 은행이 반환금액이 상대적으로 적음에도 항소를 강행하는 이유는 이번 판결로 유사한 소송들이 줄줄이 제기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번 판결로 '잘못된' 선례가 남을 경우 은행권은 약 10조원에 이르는 돈을 대출자들에게 반환해야 한다. 이런 까닭에 이전까지 15번의 관련 소송에서 '전승'을 거뒀던 시중은행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21일 법원과 은행권이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15단독 엄상문 판사는 지난 20일 장모씨가 신한은행을 상대로 낸 근저당권 설정비반환 청구소송에서 "신한은행은 75만1750원을 돌려주라"며 원고승소 판결했다.
근저당은 금융기관이 대출을 해줄 때 채무자의 집이나 땅을 담보로 잡은 후 그 권리를 등기부등본에 기재하는 것으로, 근저당권 설정비는 이때 발생하는 행정수수료 등 비용을 말한다.
재판부는 대출거래약정서와 근저당권 설정계약서 부담 주체란에 수기 표시가 없어 해당 대출상품설명서의 내용만으로는 원고와 피고 사이에 근저당권 설정비용을 누가 부담할지에 대한 실질적 개별약정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고 설명했다.
피고인 신한은행은 즉각 항소의사를 밝혔다. 이번 사건처럼 계약서에 수기 표시가 없는 경우에도 시중은행이 승소한 유사 소송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이번 판결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은행은 장씨에게 근저당권 설정비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고 선택권을 보장했다"며 "항소해서 상급심의 판단을 기다릴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해당 은행이 항소에 나서는 것은 피해금액을 최소화하려는 의도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금융소비자연맹에 따르면 2011년 대법원이 은행 약관이 부당하다는 판결을 내리기 전 10년간 주택대출을 받으면서 근저당 설정비를 부담한 소비자는 200만명으로 액수는 10조원으로 추산된다.
근저당권 설정비 반환 문제를 둘러싸고 금융사를 대상으로 한 비슷한 소송 판결이 연이어 예정돼 있는 상황에서 대출자 승소 판례가 생겨버리면 은행권이 내놓아야 할 금액도 그 만큼 증가하게 된다. 유사 소송이 잇따를 가능성도 높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다른 시중은행들도 '반환의무가 없다'는 기존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불안감을 내비치고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한 가지 예만 가지고 판단내리기는 어렵다"며 "여전히 유사소송에서 은행들이 이길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집단 소송이 크게 늘어날까봐 걱정"이라고 토로했다.
은행연합회 관계자도 "비슷한 사례를 두고 상반된 판결이 나와 당혹스럽다"면서 해당 은행이 항소하겠다고 밝힌 만큼 최종 판결을 지켜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반면 시민단체들은 "금융소비자에 대한 법원의 시각이 변화했다는 신호"라며 이번 판결에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금융소비자연맹(금소연)은 "비로소 법원이 소비자의 거래지위와 관행, 형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금융소비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올바른 판단을 내렸다"며 "이번 판결은 ‘상식’에 맞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밝혔다.
강형구 금소연 국장은 "다른 재판부에도 법과 이치에 맞는 판결을 기대한다"며 "남은 피해자들은 서둘러 공동소송에 참여해 권리를 찾아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금융소비자원(금소원)도 "향후 판결에서도 소비자 지향적인 판결을 기대한다"며 "이번 판결로 금융권의 오만한 대응과 자세가 사라져야 할 것"이라고 금융권을 질책했다.
조남희 금소원 대표는 "근저당권설정비 반환 문제로 처음 소를 제기했던 당사자로 이번 판결은 매우 의미가 깊다"며 "국내 소비자 권익을 신장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소송 남발로 사회적 비용이 증가한다는 지적에 대해 금소원은 "소송까지 가지 않고 사전 조종을 통해 피해자를 구제하는 시스템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