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승근기자] 조세피난처에 설립된 유령회사의 85%가 해운사의 특수목적법인(SPC)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30대그룹 중 16곳이 대표적 조세피난처 7곳에서 종속법인을 운영 중이며, 이중 85%가 해운업과 관련된 페이퍼컴퍼니였던 것.
절대적 비중 탓에 의혹의 눈초리가 해운업계로 쏠린 가운데, 이들은 업계 특성을 무시한 일방적 의심에 속앓이를 이어가고 있다. 실제 이들 법인의 상당수는 원활한 선박 발주를 위해 파나마 등 조세피난처에 해외법인을 설립, 운영 중이며, 이는 대부분 선주들의 요구에 의한 것이란 게 해운사들의 항변이다.
또 세무당국에 대한 신고 누락 등 불법이나 편법 없이 정상 운영되고 있어 조세피난처에 설립된 법인들에 대한 마녀사냥식 매도는 자제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조세피난처에 특수목적법인을 설립했다고 해서 무조건 역외 탈세나 비자금 조성 등과 연관시키는 것은 무리라는 주장이다. 진실에 대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4일 재벌 및 CEO, 기업경영평가 사이트인 CEO스코어에 따르면, 국내 30대그룹 중 파나마, 케이만제도, 버진아일랜드 등 7곳의 대표적 조세피난처에 종속법인을 설립한 그룹은 16개이며, 법인 수는 281개에 달한다.
16개 그룹 중 가장 많은 법인을 소유하고 있는 그룹은
STX(011810)로, 파나마에 설립한 선박금융 관련 특수목적법인(SPC)이 무려 94개나 된다. 다음은 79개 법인을 설립한 한진, 3위는 59개 법인을 설립한 SK다. 한진과 SK는 둘 다 자회사인 한진해운과 SK해운을 통해 파나마에 각각 77개와 51개의 선박금융 관련 종속법인을 보유 중이다.
(자료=재벌 및 CEO 기업경영평가 사이트 CEO스코어)
업종별로는 선박금융(224개, 79.7%)과 해양운송(14개, 5.0%)을 합친 해운업이 238개 법인으로, 전체의 84.7%나 된다. 전체 281개 가운데 43개를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해운 관련 SPC인 셈이다.
이처럼 해운 관련 종속법인이 많은 것은 해운사들이 SPC 방식으로 선박을 취득하거나 빌려서 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운사들은 배를 건조하거나 용선할 때 자금을 단독으로 대지 않고 금융사(대주사)들이 제공하는 선박금융을 이용하게 되는데, 이때 대부분의 해외 금융사들이 담보권 행사를 손쉽게 하기 위해 조세피난처에 SPC 설립을 계약조항으로 내세운다.
때문에 STX, 한진, SK 같은 대형 해운사들이 배 한 척을 취득하려면 자동으로 SPC 하나를 설립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메이저 해운사들이 조세피난처에 해운 관련 법인을 적게는 수개에서 많게는 수십개까지 보유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SPC 방식을 운용하면 대주사는 해운사가 부도 등의 위기에 처했을 때도 선박이 다른 채권자에게 담보로 넘어가는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고, 해운사도 선박을 직접 구매할 경우에 지게 될 각종 재무적 리스크를 피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아울러 이들 조세피난처 국가에 전 세계 선박의 80~90%가 몰려 있는 만큼 각 나라별 해운 운임과 선박금융 금리 등이 세계 기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점도 해외 금융사들이 조세피난처에 SPC 설립을 유도하는 주된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같은 이유로 전 세계에서 배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그리스의 경우에도 그리스 국적의 선박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한편 해운관련 법인 다음으로는 지주회사가 18건(6.4%), 투자법인 7건(2.5%), 해외자원개발 법인 3건(1.1%) 순이지만, 해운관련 법인에 비해서는 턱없이 적다.
소재지별로는 파나마가 압도적이다. 여기에는 STX, 한진, SK 등 해운 3사 외에 삼성, LG, 포스코, 현대중공업 등 10대그룹 241개 법인(85.8%)이 대거 몰려 있다.
파나마는 과거 대표적 조세회피지역으로 낙인 찍혔으나, 지난해 12월 OECD 블랙리스트에서 이름이 빠졌다. '국제적으로 합의된 세금 표준을 구현하는 국가'를 지칭하는 '화이트 리스트'에 오른 것.
조세피난처 종속 법인 중에는 대기업 해외법인들도 적지 않다.
포스코(005490)는 파나마에 엔지니어링·구매·건설법인 1개사, 케이만 제도에 서비스 관련 1개사를 설립해 운영 중이고, SK와
효성(004800)은 각각 연구개발법인 1개사와 변압기 제조법인 1개를 케이만 제도에 두고 있다.
박주근 CEO스코어 대표는 "최근 조세피난처에 설립된 법인들을 탈세와 연관짓는 분위기가 팽배한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이들 해외법인도 국세청과 금감원 등에 운영 내용을 신고하고 현지법인 발생 소득도 국내 세법에 따라 이미 과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 대표는 "조세피난처에 있는 이들을 모두 탈세범으로 몰면 심각한 행정력의 낭비만 초래된다"며 "다만 공시도 제대로 하지 않고 몰래 종속법인을 운영하는 불투명한 기업들은 우선적으로 솎아낼 필요가 있다"고 선별적 접근을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