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야연구소를 가다)⑧한국노동사회연구소 "노동자와 28년 동고동락"

'평등사회' 모색 국내대표 노동계 싱크탱크..위기 맞은 노동운동, 이정표 찾기

입력 : 2013-07-15 오전 8:43:10
[뉴스토마토 김원정기자] '재야'는 제도권에 속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사전에는 "벼슬하지 않고 민간에 존재한다"고 정의할 정도로 권력과는 거리를 두고 쓴소리 내는 재야에 기반을 둔 연구소들이 우리 주변에도 적지 않습니다. 정부 산하이거나 대기업이 운영하는 여러 연구소들이 제도권의 정책을 보완해서 풍부하게 만드는 것과 달리 제도권 정책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정책을 감시하고 더 나은 대안을 고민하는 것이 이들 재야연구소의 주업무입니다. 뉴스토마토는 소수의 목소리로 묻혀있는 이들 재야연구소의 목소리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특히 새정부 출범 전후로 빚어진 현안과 향후 이슈에 대한 이들의 견해는 귀기울일만 합니다. [편집자]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노동자의 입으로 말합니다." 
 
노동자 편을 자임하는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지향점은 또렷하다. '현장'과 '이론'을 접목해서 노동운동이 나아갈 방향을 발굴하고 제시하는 것. 연구소의 28년 궤적을 따라가면 한국 노동운동이 거쳐온 역사를 훑을 수 있다.
 
 
 
◇한국노동교육협회가 모체..조합원 대상으로 '교섭'부터 가르쳐
 
한국노동사회연구소는 지난 1986년 김금수, 김유선, 천영세씨가 만든 한국노동교육협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협회는 이름 그대로 노조 간부 등을 대상으로 노조 활동을 '교육'하는 게 주된 역할이었다.
 
협회 출범 이듬해 발간된 5권의 책(<노동조합이란 무엇인가>, <노동조합 어떻게 만드는가>, <노동조합 일상생활 어떻게 하나>, <노동조합 임금교섭 어떻게 하나> <노동쟁의 어떻게 하나>)은 당시 시대 분위기를 웅변한다.
 
"그때는 노동현장에서 교육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노조활동의 핵심이 교섭인데 사측과 어떻게 교섭하는지도 몰랐다. 노조 요구안은 어떻게 작성하고 교섭은 어떤 절차로 이뤄지는지 말 그대로 'ABC'부터 가르쳤다."
 
이명규 연구실장의 설명이다. 1980년대 전반기 노동현장은 민주화를 열망하는 목소리가 뜨거웠지만 노조 자체는 규모나 활동이 체계를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협회는 이런 상황에서 '노조 교육'으로 노동운동의 일익을 담당했다.
 
사진제공: 한국노동사회연구소
 
'6월 항쟁'이 있던 1987년은 한국사회에 여러모로 중요한 해였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열기는 노동현장에도 스며들었고 그 해 7, 8, 9월 전국 수천개 사업장에서 파업을 벌인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며 노동조합과 노동단체도 체계를 갖추고 그 수와 규모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때맞춰 협회도 새로운 역할을 찾기로 한다. 기존 '조합원 교육'을 조직화된 노조 안에서 자체해결하게 되고 노동단체 외형이 커짐에 따라 외곽에서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싱크탱크로 자리매김하고자 한 것. 협회가 연구소로 전환한 배경이다.
 
"노동운동의 발전의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과 권력측의 지배와 통제도 더욱 강화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연구소가 창립취지문에서 이렇게 밝혀놓은 것처럼 이전과 달라진 노동현장 분위기도 정책을 만들어낼 연구소 설립의 이유가 됐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는 1995년 4월28일 발기인 228명, 후원금 4400만원으로 발족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연구소 발족 당시 이사장은 고 김진균 서울대 교수, 소장은 김금수 전 노사정위원장이 맡았고 지금은 이원보 이사장과 노광표 소장이 연구소를 이끌고 있다.
 
 
사진제공: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노동운동 지원하는 싱크탱크로 새출발..현장과 이론 접점 찾기 계속
 
연구소가 하는 일은 크게 연구와 출판, 교육과 상담으로 나뉜다. 세미나와 외부강연 등 교육사업은 지금도 활발히 잇고 있지만 연구소의 무게 중심은 정부기관, 노조, 민간회사에서 발주하는 연구과제를 수행하는 역할로 옮겨가 있다.
 
지난해 기준으로 연구소가 따온 연구과제는 모두 15개로 이 가운데 '서울시 좋은 일자리 만들기 기본방안 연구'가 서울시 비정규직 노동자의 직접고용 전환을 견인하는 등 노동정책에 실제 반영되는 사례가 없지 않다.
 
지난 4월 100회차를 맞은 '노동포럼'도 연구소의 대표적 브랜드다. 당시 노동포럼의 주제로 잡았던 '사내하도급 개선 방안'은 노동계에서 요구하는 경제민주화 법안 중 하나로 올해 국회 통과를 목표로 하고 있다.
 
연구소는 그밖에 50권이 넘는 책을 냈고 기관지 <노동사회>는 170호까지 발간된 상태다. 연구인력은 상근과 비상근, 객원연구위원 합쳐서 15명이고 올해 1월 기준 회원은 790명이다.
 
오랜 역사뿐 아니라 규모면에서도 국내 대표적 노동연구기관으로 우뚝 서 있다.
 
      
   
 
세계화 바람이 노동시장 유연화를 불러오면서 한국 노동운동은 위기 상태다. 고용불안정이 확대되면서 노동현장의 양극화 문제가 새롭게 부상했다.
 
예전엔 노동자 하나였지만 지금은 정규직 따로, 비정규직 따로다. 노동단체 스스로 사회적연대를 위한 해법을 내지 못함에 따라 연구소 활동도 분주해졌다. 이와 별개로 복수노조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고 청년유니온처럼 새로운 노조 형태도 나타나고 있다.
 
노동현장의 연구과제는 워낙 많지만 양극화의 원인과 해법을 밝히고 노동자를 한데 모아 경영 참여, 나아가 정치세력화를 모색하는 건 연구소가 앞으로도 천착할 과제다.
 
연구소는 올해 사업계획을 노동운동의 위기 극복 방안으로 정했다. 과거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용공세력으로, 지금은 같은 노동자 위에 군림하려는 이기적 집단으로 매도되는 상황에서 왜곡된 논리는 반박하고 노동운동이 올곧게 자리잡을 수 있도록 방향타를 잡아주고자 연구소는 계속해서 한길을 걷고 있다.
 
◇“반듯한 시간제 일자리?..지금 있는 시간제일자리 처우부터 해법 내놔야”
 
‘노동운동의 위기’는 지겹도록 반복된 이야기다. 워낙 반복적으로 통용되다 보니 정확한 실체 보단 빨간색 머리띠와 갈등, 외면 같은 단어가 피상적 이미지로 사람들 머릿속을 휙 지나치는 상황이 됐다.
 
이명규 연구실장(아래 사진)은 이런 단편적 시각이 현실의 문제를 은폐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위기의 본질은 자본권력의 정교한 억압에서 찾아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노동자에 대한 억압이 정교해지다보니 연구소의 고민도 적지 않다. 연구소는 올해 사업방향을 ‘노동운동의 위기 극복 모색’으로 잡았다.
 
노동현장과 좀 더 밀착해 소통한다는 취지로 이슈페이퍼 발간과 노동포럼 개최를 강화한다는 방침도 세웠다.
 
그는 연구소 역사를 설명하며 "한국 노동운동이 양적 질적으로 팽창하며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 시점을 1987년으로 잡고 있지만, 1980년대 노동자대투쟁은 그 이전 1970년대 현장과 교류한 민주노조운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이 연구실장과의 일문일답.
 
사진제공: 이명규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실장
 
- 올해 주력사업은.
 
▲노동운동이 침체돼 있는 상황 아닌가. 때문에 노동운동의 위기를 진단하고 위기 극복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물론 어려운 과제다. 주제 자체가 쉽지 않으니까.
 
우리의 방향성과 연구과제로 들어오는 프로젝트는 조금 차이가 있긴 하다. 공공기관 비정규직 고용, 처우 개선 그런 과제가 올해 확실히 많이 들어오고 있는데 연구사업도 그것대로 진행할 것이다. 
  
-노동운동이 위기라고 보는 이유는.
 
▲노조 조직율은 정체상태고 노동운동 안에서 비정규직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총의 목소리나 영향력도 크지 않고 사측과 대등한 관계를 갖지 못하는 상태다.
 
2000년대 전후로 외부로부터 오는 위기냐, 내부에서 나오는 위기냐 계속 나온 이야기인데 최근 위기는 내부위기가 심각하다고 본다. 물론 노동시장 유연화에 따른 외부 압력이 위기를 불러온 측면도 크긴 하지만.
 
특히 비정규직 문제 해결과 관련해 민주노총 등 조직 차원에서 해결해줘야 하는 연대나 소통 노력이 부족하다.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비정규직 입장에선 모자란 수준이다.
 
사진제공: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노동운동의 위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이해가 대립한다는 식의 주장이 많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이기주의는 어디까지 사실인가.
 
▲그 담론은 사실 노무현 정부 때 만들어진 것이다. 현대차 노조의 임금교섭을 도덕적으로 비판하면서 유행한 말인데 정규직 이기주의가 없진 않지만 무조건적인 비판 보다 이해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
 
노동자 연대가 왜 안되고 있을까? 요즘은 상시적 구조조정이 이뤄진다고 하지 않나? 정규직도 정리해고 당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 사람들도 위험에 노출돼 있는 것이다.
 
물론 노동자끼리 하나로 똘똘 뭉쳐 저항하면 좋겠지만 이런 상황을 같이 볼 필요가 있다. 큰 틀에서 봐야 한다.
 
-연구소 활동 초기와 비교해 지금 노동자 삶은 나아졌는가.
 
▲소득 분배율을 따져보면 답이 나온다. 지금 문제는 눈에 보이는 노동자 삶은 개선됐는데 그 껍질을 까고 들어가면 사회 전분야에서 양극화가 극심해진 상황이 됐다는 데 있다.
 
워킹푸어라고 하지 않나. 일을 해도 빈곤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생산성이 높아진 만큼 그 빛이 사회 전반에 골고루 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전체 파이는 많이 개선되고 있는데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몫이 작다. 한국은 겉으로 잘 성장하고 있지만 노동자는 그렇지 못하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로 빠지면 계속 루저로 살아야 한다. 정규직 버스에 타야 루저가 아니니까, 정규직 버스를 타야 목적지에 갈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버스에서 안 내리려고 서로 짓밟는 상황이다. 어차피 버스에 올라탈 수 있는 인원은 한정돼 있으니까.
 
지금의 노동시스템은 이런 상황으로 노동자를 몰고 간다. 사용자는 더 많이 가져가고 있는데 버스에 타려고 아웅다웅하는 노동자만 욕하는 건 그래서 잘못이라는 이야기다.
  
자료제공: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시간제 일자리 답이 될 수 있을까 
 
-현안에 대한 질문이다. 박근혜정부가 고용률 70%를 내걸고 대책으로 시간제 일자리 늘리기를 내놨는데 시간제 일자리는 답이 될 수 있는 건가.
 
▲고용률은 물론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고용률을 올리는 방법은 사실 어렵지 않다. 월급 70~80만원 주고 알바를 많이 고용해도 고용률 자체는 올라간다. 과거 공공부문에서 많이 고용한 인턴이 그런 것이다.
 
중요한 건 어떤 일자리냐 하는 점인데 공공부문에서 인턴으로 채용된 사람들 실태를 보면 주로 자료 복사 등 많이 했다. 경력에 전혀 도움 안 되는 일이다. 그냥 일자리 말고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고용은 양과 질 두 축으로 봐야 하고 둘이 동시에 같이 가야 한다. 그런데 정부는 고용의 양만 생각하고 고용의 질은 생각을 안 한다. 왜냐면 고용의 양은 가시적으로 드러나니까. 하지만 고용질은 사쪽 동의를 얻어야 하지 않나.
 
정부의 주장은 “반듯한 시간제 일자리”이지만 빠진 게 있다. 시간제 일자리 현재가 어떤가? 각종 보험이 적용되지 않고 있는 것은 물론 노동조건을 봐도 대단히 열악하다. 고용질이 이렇게 나쁜데 이에 대해 어떤 개선책을 내놓을 거냐, 그에 대한 해법 없이 고용률만 제시하는 건 대책이 될 수 없다.
 
아마 민간기업에서 하기 어려우니 이번에도 공공기관부터 할 텐데 현실을 봐야 한다. 현재 있는 시간제 일자리에 대한 처우개선부터 제시해야 맞다.
 
사진제공: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최저임금 현실화는 사회정의 문제”
 
- 최저임금의 적정수준은 어느 정도가 좋다고 보는가.
 
▲우리 연구소 입장에선 노동자 평균임금의 50%가 돼야 한다고 본다.
 
- 최저임금을 현실화 하자, 혹은 인상하자는 주장에 대해 반대목소리도 만만치 않고 특히 영세업체가 더 피해를 보게 된다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는데.
 
▲이 문제는 사실 정의에 대한 문제라고 본다. 제대로 된 삶을 살기 위해 최소한 이 정도는 필요하다, 해외수준을 참고해 우리도 이 정도는 가자는 것이다.
 
데이터를 보더라도 최저임금 인상이 경제적 효과가 있다는 자료도 나오고 있다. 우리가 제시하는 수준이 뜬금없이 나온 건 아니라는 것이다.
 
최저임금을 인상하면 고용이 안 되고 영세업체가 몰락한다? 상식적 차원에서 고용이 줄 거 같지만 통계상 꼭 일치하진 않는다. 최저임금이 고용에 미치는 영향은 학자마다 통계치가 다 다르다.
 
중요한 건 최저임금 인상이 사회 전체적으로 소득 불평등 문제를 완화하는 역할이 크다는 데 있다.
 
우리나라는 법정최저임금, 다시 말해 법으로 이를 정하고 있는데 이걸 이렇게 정하는 건 이유가 있다. 취약계층이라도 삶을 영위하는 데 최소한의 재정을 보장해 주자는 것이다. 임금격차가 커지면 그만큼 사회문제화 될 수 있다. 
 
 
사진제공: 한국노동사회연구소
  
- 비정규직 해법 있을까.
 
▲기본적으로 법적 규제가 강화돼야 하고 실질적으로 노동질을 제고하도록 해야 한다. 네덜란드도 파트타임 일자리가 많지만 사회문제가 안 되는 이유는 정규직과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비정규직이 2등 시민이다. 비정규직은 그 자체로 사회루저가 되는 걸 의미한다. 정부 차원에서 이런 문제를 해소하는 게 필요하다. 비정규직 사용이 많으면 사회문제가 된다는 걸 알아야 한다.
 
- 사측에선 비용 문제 들고 나올텐데.
 
▲이마트 같은 대기업을 보면 총수들 검찰에 불려가고 하면 갑자기 고용 전환을 발표한다. 큰돈 든다고 하지만 그동안 할 수 있는데 안했다는 얘가 아닌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거다. 비정규직의 고용질을 높이면 생산성이 향상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얼마든지 윈윈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
 
생산성을 올리기 위해 쥐어짜는 방식도 있지만 노동자 스스로 ‘일이 재미있다’ 느끼게 하는 것도 방법도 있다. 안정된 일자리를 제공해서 열심히 일하게 하는 방식이다. 구글도 그렇고 외국에선 그렇게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신자유주의에서 이야기하는 노동시장 유연화 전략은 이제 한계에 부딪친 게 명백해지지 않았나? 값싼 임금으로 쥐어짜는 방식은 실패했다. 이런 흐름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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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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