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승근기자] "사업 밑천인 선박을 비롯해 돈이 될 만한 건 모두 내다 팔고 있다. 할 수 있는 건 다하고 있지만 탈출구는 여전히 보이질 않는다."
해운업 종사자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다. 가장 시급한 문제인 유동성 확보를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 보지만 일시적 처방에 그칠 뿐, 문제의 본질에는 접근조차 못하고 있다는 하소연이다.
◇"넘치는 선박 수를 줄여라"..지난해 폐선량 사상 최대
업계에서 꼽는 해운업 침체의 가장 큰 이유는 시장의 선박 공급과잉.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기 이전 선사들이 발주한 선박이 최근 시장에 쏟아져 나오면서 공급과잉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물동량은 조금씩 증가세를 보인다지만 공급과잉을 이겨낼 정도는 아니다.
때문에 해운업 회복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서는 선박 수를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몇 년 전부터 업계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도 노후 선박을 중심으로 해체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평년 기준 한 해 1800~2000만DWT(재화중량톤수) 물량의 노후선이 해체됐지만 2011년부터는 매년 노후선 해체량이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에는 노후선 폐선량이 약 6000만DWT에 달해 평년 대비 3배가량 많은 선박이 줄어들었다.
2008년 하반기 이후 해운업 침체 초기엔 배를 놀리면서 정박료 등 일종의 유지비를 대는 것보다 고철로 내다 파는 것이 낫다는 인식이 강해 해체하는 일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연료비에 대한 부담 때문에 고연비 선박으로 바꾸면서 해체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하지만 정부 지원을 등에 업은 글로벌 선사들이 최근 고연비 선박을 연달아 발주하는 데다 중국 정부가 자국 조선업 회복을 위해 발주 물량을 쏟아내면서 선박 공급 과잉 문제 해결까지는 시일이 더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또 대부분 선박 건조 시 선박에 담보를 걸고 건조 비용을 조달하는 관행 때문에 해운사들에 선박 소유권이 있다 하더라도 매각이 쉽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1척 내지 2척의 선박을 보유하고 있는 일부 중소 해운사들의 경우에는 선박 매각으로 남은 선박이 없을 경우 해운 면허가 취소돼 함부로 매각할 수도 없다. 진퇴양난이다.
◇'팔고 줄이고'..유동성 확보 박차
상황이 이러자 자연스러운 도태 과정을 통해 선박 수가 줄어들 때까지 버틸 수 있는 유동성 확보가 해운사들의 최우선 과제로 떠올랐다. 일단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얘기다.
운임의 30% 가까이를 차지하는 연료비를 포함해 각종 비용을 줄이는 한편 회사채 발행과 보유자산 매각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일이 주요업무가 됐다.
◇장기 침체에 빠진 해운업계가 불필요한 자산은 모두 매각하고 추가로 회사채를 발행하는 등 유동성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자금 조달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사진=뉴스토마토 자료)
한진해운(117930)과
현대상선(011200) 등 대형 해운사들을 중심으로 올 초부터 보유 선박을 ‘세일 앤 리스백(Sale & Lease back)’ 형태로 매각하고, 크레인 장비 등 보유 자산을 현금화하는 작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추세.
아울러 세계 주요 기항지의 유가를 수시로 파악해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로테르담, 싱가포르 등의 지역에서 연료를 급유하고 선박 항해 속도를 늦추는 등 연비 효율을 높이는데 주력하고 있다.
해운사마다 경로 최적화 시스템을 도입해 운항 노선을 최단거리로 설정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작업은 이미 효율을 최대치로 끌어 올린 상태로, 더 이상 비용 절감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게 업계의 주장이다. '마른 수건 쥐어짜기'라는 얘기다.
특히 노선 효율화 작업의 경우 대형 선사들을 중심으로 각국의 해운사들과 컨소시엄을 이뤄 공동 운영하기 때문에 국내 해운사 마음대로 일정 노선을 줄이거나 추가하기는 어렵다.
인력 구조조정도 간단치 않은 문제다. 해운사는 보통 영업 및 영업관리 인력 비중이 높은데, 화주들이 이들과의 관계에 얽매여 물량을 맡기는 경우가 많아 인력 손실은 곧 일감 부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중소 선사들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인력을 아웃소싱 형태로 운영하고 있어 줄일 만한 인력도 거의 없는 편이다.
회사채 발행도 쉽지 않다. 해운업 경기가 단시간 내에 회복되기 힘들다는 전망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선뜻 돈을 내줄 은행도 없거니와 대형 해운사들도 이미 부채비율이 700~800%에 육박해 있어 위험 부담이 높은 상태.
한국은행이 최근 발표한 금융안전보고서에 따르면, 해운업의 예상부도확률(EDF)은 8.5%로 건설업(9.1%)에 이어 두 번째로 높았다.
국내 해운사들의 자기자본비율은 지난해 말 16%로 2010년 말(32%)과 비교해 절반으로 뚝 떨어졌고, 유동비율은 68%를 기록할 정도로 재무상태가 악화됐다. 해운사들이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토로한 이유다.
◇선택과 집중만이 해답..자신만의 영역 구축해야
그렇다고 업황 탓만 하고 앉아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부의 대규모 지원이 절실하지만 언제까지나 정부 입만 바라보면서 기다릴 수는 없다. 최대한의 자구책은 마련해야 한다. 이는 곧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길이기도 하다.
업계에서는 고려해운, 장금해운 등 업황 침체 속에서도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중견 선사들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양사는 선택과 집중을 통해 자신만의 강점을 특화시켜 불황에도 안정적인 매출을 올리고 있다는 게 안팎의 공통된 평가다.
2008년 이전 해운업 호황기 시절, 대형 선사들이 미주와 유럽 등 운임이 높은 장거리 노선에 벌크선을 투입해 막대한 이익을 냈을 때도 이들은 아시아 단거리 노선에 컨테이너선을 운영하며 차별화 전략을 펼쳤다.
당시에는 대형 선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매출을 올렸지만 세계 경기가 침체되면서 경기 영향을 많이 받는 미주, 유럽 노선에 비해 안정적으로 매출을 유지할 수 있는 황금알로 부상했다.
이와 함께 호황기 때도 무리한 사업 확장에 나서지 않고 내실을 키워 온 점 또한 본받아야 할 점으로 꼽히고 있다. 외형적 확장보다는 내실 경영에 치중하면서 실속을 키웠고, 이는 곧 해당 분야에서의 경쟁력과 시장신뢰로 이어졌다. 진정한 강자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글로벌 선사들을 비롯해 국내 대형 선사들이 호황기 때 기항지를 늘리고 새로운 노선을 개발하기 위해 대규모 투자를 단행할 때 내실을 키우고 미래의 리스크에 대비한 점이 불황을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는 분석이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세계 1, 2, 3위의 글로벌 선사들도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등 불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추세"라며 "규모를 늘리는 기존 관행을 버리고, 선택과 집중을 통해 경쟁사와 차별화하는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