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미애기자] 삼성그룹이 올 상반기 신입사원 채용부터 시행키로 했던 대학총장추천제도를 전면 유보키로 했다. 서류전형 부활도 없던 일이 됐다. 삼성이 삼성의 벽을 넘지 못했다.
채용제도 개선 발표 직후 대학과 정치권에서는 총장추천제를 놓고 각종 논란과 비판으로 들끓었다. 채용시장은 발칵 뒤집혔다. 급기야 전국 4년제 대학의 협의체인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다음달 5일 정기총회에서 삼성의 총장추천제에 대한 대응 방안을 안건으로 올려 공동 대처하기로 했다.
논란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결국 삼성이 물러섰다. '삼성입사 사교육 시장'의 틀을 깨기 위해 '총장추천제·서류전형'을 도입하려 했다지만 '대학서열화, 지역 및 성차별' 논란의 역풍을 맞아 스스로 거둬들였다. 삼성이 신(新)채용제도 개편안을 발표한 지 불과 2주 만이다.
◇'총장추천제' 전면 유보..삼성 "여론 부담"
삼성의 신입사용 채용제도는 원점에서 재검토된다. 일단 기존방식을 유지키로 했다.
삼성그룹은 28일 긴급 브리핑을 자청, "삼성직무적성검사(SSAT)로 인해 취업 사교육 시장이 형성되는 등 과열 양상이 벌어지며 사회적 비용이 커졌고, 스펙 쌓기 경쟁에 대한 우려도 컸다"며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새로운 채용제도를 발표했지만 대학서열화, 지역차별 등 뜻하지 않은 논란이 확산되면서 사회적 공감대를 얻기 어렵다는 판단에 이르렀다"고 설명했다.
채용제도에 대한 거센 사회적 비판은 삼성에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했다.
삼성 관계자는 "당초 총장추천제는 지원자의 희생정신, 인성 등 우리가 찾지 못하는 부분을 학교에서 찾아서 추천해 줬으면 좋겠다는 취지로 도입한 것"이라며 "일종의 정량평가가 아닌 정성평가를 해 달라는 거였는데, 미처 생각지 못했던 논란이 일면서 이 제도를 운영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했다"고 말했다.
따라서 올해 삼성의 상반기 채용은 SSAT를 위주로 한 공개채용(공채) 방식을 종전대로 유지하게 됐으며, 당분간 삼성의 채용제도에도 큰 변화를 주기는 어렵게 됐다.
다만 "계기가 된(삼성고시로 불릴 정도로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 등) 문제점은 여전히 존재하므로 채용제도 개선안에 대해서는 계속 검토해 나가겠다"는 게 삼성 측 설명이다.
◇삼성(사진=삼성그룹)
◇채용개편안에 대학가 반발.."삼성 줄세우기"
'총장추천제'는 삼성그룹이 전국의 4년제 대학 총장들에게 일정 인원의 추천권을 부여하는 제도다. 추천대상은 서류전형 없이 SSAT로 직행한다. 앞서 삼성이 추천인원을 확정해 각 대학별로 협조 요청 공문을 보내면서 대학가는 발칵 뒤집혔다.
전국대학교기획관리자협의회에 따르면 전국 4년제 대학 204개 중 삼성으로부터 가장 많은 추천권을 받은 대학은 성균관대로 115명의 추천권을 확보했다. 두 번째가 서울대와 한양대(각 110명), 다음으로 연세대와 고려대(이상 100명) 순이다.
경북대가 연·고대와 같은 100명을, 부산대가 90명을 배정받게 돼 영남권 대학이 전남대와 전북대 등 호남권 국립대학 배정수보다 많아 '지역차별'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삼성은 전남대 40명, 전북대 30명, 목포대 10명, 호남대 10명, 동신대 8명 등을 배정했다.
또 이화여대(30명), 숙명여대(20명), 서울여대(15명), 덕성여대(10명) 등은 상대적으로 적은 할당 인원을 통보받아 성차별에 대한 논란도 거세게 일었다. 삼성은 이에 대해 여자대학들의 이공계 비중을 고려했다고 해명했다.
지난 주말부터 인터넷과 SNS를 중심으로 '삼성의 대학 줄세우기'라는 비판이 끊이질 않았으며, 주요 포털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 1위부터 10위까지가 모두 '삼성' 관련 검색어로 도배됐다. '삼성 한양대', '삼성 계명대' 등 '삼성 XX대' 형식의 검색어다.
사회 각계 각층에서도 삼성의 '총장추천제'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페이스북에 "전 세계 유래 없는 오만방자와 방약무인"이라며 "명문대 서열이 삼성의 할당숫자로 바뀌고 대학들은 할당인원을 늘리려고 삼성로비에 나서며 학내에서는 추천받기 위한 내부경쟁이 치열해 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학생·청년들로 구성된 시민단체인 청년유니온도 "삼성이 추천권이라는 칼을 일방적으로 휘두르고, 대학들은 이를 따를 수밖에 없다"며 총장추천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대학가의 반발도 거셌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도 삼성의 '대학 할당제' 시정을 요구하기 위해 공동대응 방침을 밝혔고, 고려대 총학생회는 보이콧 입장까지 내비쳤다.
◇남은 과제 산적..대학생들 불안감 여전
이날 이인용 삼성 미래전략실 커뮤니케이션팀장(사장)은 서초동 삼성그룹 기자실을 찾아 "스펙 쌓기 경쟁 등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새로운 신입사원 채용제도를 발표했지만, 뜻하지 않았던 논란이 확산되면서 사회적인 공감대를 얻기 어렵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각 대학과 취업준비생들에게 혼란을 드려 대단히 죄송하다"고 머리를 숙였다.
이번 해프닝으로 취업시장의 혼란만 가중됐다. 동시에 삼성만 바라보는 획일적 대학문화에 대한 자성도 촉구됐다. 다만 삼성이 자책을 인정하고 거둬들이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진정을 찾아갈 전망이다.
불안은 여전하다. SSAT 시험을 준비 중인 김모씨(26·여)는 "재계 서열 1위라는 삼성이 새로운 채용제도를 발표한지 2주만에 바꿨는데, 새로운 채용제도가 또 안 나오라는 법이 있느냐"고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 김씨는 "총장추천제와 서류전형을 도입한다길래 스터디 모임 다시 구성하느라 시간을 보냈는데, 원점에서 재검토한다는 말을 들으니 '멘붕' 수준"이라며 허탈해 했다.
더욱이 삼성이 기존 평가영역에 공간지각능력·인문학적 지식에 관한 문항을 확대하려 했던 SSAT 내용 개편은 그대로 추진한다는 입장이어서 취업시장은 다시 열풍을 맞게 됐다. 온라인 취업 커뮤니티에서는 "믿을 수 있는건 SSAT 밖에 없다. SSAT 더 열심히 파자', 'SSAT 어떻게 바뀌나' 등 SSAT 열풍이 몰아치고 있다.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과 스스로에게 부과된 과중한 부담을 해결하기 위해 삼성이 야심차게 내놨던 '총장추천제'를 삼성 스스로 어떤 수준으로 재검토할지, 방향은 어떤지, 도입시기는 언제인지가 또 과제로 남았다. 채용제도 개선의 과제는 남아있다고 삼성이 밝힌 만큼 '삼성고시 열풍'을 꺾을 신채용 제도는 여전히 삼성의 몫으로 남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