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윤석진기자] 크림 자치공화국이 분리독립 단계를 착착 밟아가면서 무력 충돌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크림을 붙잡아 두려는 우크라이나와 크림 독립을 지지하는 러시아 간의 국지전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크림 의회가 '독립선언'을 채택한 날 20년 만에 최대 규모의 군사훈련에 돌입했다. 군사 훈련이 종료된 지 일주일만에 또다시 군사 재정비에 나선 것이다.
우크라이나도 질세라 군사훈련에 들어갔다. 키예프 과도 정부는 크림이 러시아로 편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경 수비대를 2만명까지 동원하기로 했다.
외교채널이 막힌 것도 무력 충돌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이다. 러시아는 미국이 제안한 중재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크림 반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지만, 외교적 타협의 여지는 점점 더 좁아지는 양상이다.
◇크림 독립결의안 채택..군사 충돌 가능성 커져
11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은 크림자치공화국이 우크라이나에서 분리 독립을 촉구하는 독립결의안을 채택했다고 보도했다. 참석 의원 100명 중 78명이 찬성표를 던지면서 독립결의안은 가결 처리됐다.
크림의회의 독립 선언서 채택은 국제법을 충족시켜 러시아와의 합병을 원활하게 진행하려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크림이 독립국이 돼야 러시아의 합병이 우크라이나 침략으로 간주되는 상황을 막을 수 있다.
블라디미르 콘스탄티노플 크림자치공화국 의회 의장은 "독립선언서를 채택해 우리가 공화국임을 선포했다"며 "이제 독립국 자격으로 러시아에 편입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이제 오는 16일 러시아와의 합병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과반수가 찬성표를 던지면 크림은 러시아 영토가 된다. 물론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서방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최소한 크림의 분리·독립 움직임을 뒷받침하는 강한 명분이 생기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중앙정부는 마음이 급해졌다. 미국과 러시아까지 가세해 크림을 둘러싼 국지전이 벌어질 가능성도 커졌다.
우크라이나 의회는 이날 독립선언서를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을 밝히면서 오는 12일까지 주민투표를 철회하지 않으면 크림 의회를 강제 해산하겠다고 경고했다.
아울러 키예프 중앙 의회는 보병, 전차, 첩보부 등을 총망라한 대규모 군사훈련에 들어갔다. 국경 수비를 강화하겠다는 이유에서다. 아르센 아바코프 크라이나 과도정부 내무장관은 "필요시 2만명의 병력을 모집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도 친서방 성향의 우크라이나 중앙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군사훈련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미국은 조지 H W 부시 항공모함을 터키 안탈리아에 정박시켜놓고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같은 날 러시아도 대규모 공수 훈련을 강행했다. 우크라이나 접경지역에서 벌였던 비상 군사훈련 이후로 두 번째다.
◇러시아 군인으로 추정되는 무리가 크림반도 외곽 지역을 순찰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이번 훈련에는 4000명에 이르는 공수요원과 수송기, 전투기 30대가 참가했다. 러시아 정부는 크림과 관계없는 일상적인 훈련이라고 밝혔지만, 키예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압력으로 보고 있다. 키예프 의회에 따르면 크림에는 이미 1만9000명의 러시아 군인이 상주하고 있다.
사실 양방의 군사 훈련이 있기 전부터 외교적인 방식으로 사태를 수습하자는 말들이 적지 않게 오갔다. 그러나 그때마다 양측은 의견차를 좁히지 못해 협상은 무산됐다.
우선 키예프 중앙정부와 크림 의회는 서로 불법 집단이라며 대화 자체를 하지 않고 있다. 그들 뒤에 버티고 있는 미국과 러시아도 뾰족한 중재안을 내놓지 못했다. 지난 10일 러시아는 미국이 내놓은 중재안을 거절하고 독자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서방연합, 러시아 제재·우크라이나 지원..투트랙 전략
미국과 유럽 등 서방은 군사 대응보다 경제·외교적 제재를 강화하고 있다. 러시아를 국제 사회로부터 고립시켜 크림에서 철수하도록 유도하겠다는 전략이다.
로랑 파비우스 프랑스 외무장관은 이날 "러시아에 대한 자산동결 등의 2단계 제재 조치를 이번 주부터 실행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헤르만 반 롬푀이 EU 정상회의 상임의장도 "러시아가 협상에 나서지 않는다면 여행 금지와 자산 동결, 정상회담 취소 등의 제재를 추가로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EU는 오는 17일부터 군사 개입에 대한 대처로 추가 제재에 들어갈 방침이다.
이미 EU는 이미 1단계 제재로 러시아와의 비자면제 협정을 중단한 바 있다.
아울러 EU는 우크라이나 국고를 탈취한 혐의를 받고 있는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 그의 두 아들을 비롯한 18명의 정치인에 대한 경제적 제재를 강화했다.
EU가 제재 조치를 강화할 무렵 미국도 나름의 러시아 제재 행보를 이어갔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사진)은 지난 6일 크림 군사개입에 관련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인사를 제재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사인했다. 8일에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주요 6개국 정상들과 크림 사태 해결을 위한 전화회담을 했다. 서방 주요국을 결집해 러시아의 군사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한 행보로 풀이된다.
서방측은 러시아 제재와 동시에 우크라이나에 대규모 차관을 약속하는 등의 회유책도 병행했다.
경제난과 정정불안이란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는 우크라이나인들의 민심을 사로잡는 한편 독립국 2위 경제 규모인 우크라이나와의 경제 공조를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과 유럽, 세계은행(WB), 국제통화기금(IMF)은 약속이라도 한 듯 연이어 우크라이나에 자금지원을 약속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10억달러를 긴급 지원하기했고 EU는 수년 내로 무상지원과 유상차관 등 총 100억유로를 지원하기로 했다. WB는 올 한해 동안 구조개혁 명목으로 30억달러를 제공할 예정이다. IMF도 경제 실사가 마무리되면 금융 및 기술적인 지원을 제공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정상화 힘들어..주변국 경제 타격 '심각'
이처럼 우크라이나를 정상화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으나, 언제쯤 회복세로 접어들지는 미지수다. 불확실성이 커진 탓에 주변국들 또한 불이익을 당할 것으로 보인다.
사태의 중심에 서 있는 우크라이나 경제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다.
우크라이나 통화인 그리브나 가치는 지난 한 달 사이 달러 대비 무려 20%나 곤두박질쳤고 외환보유고는 150억달러로 줄었다. 지난 2011년 400억달러, 지난해 말 204억달러에서 급격하게 쪼그라든 것이다. 지난달에는 은행 예금의 7%가 빠져나가는 뱅크런 징후를 보이기도 했다.
러시아 가스 수입에 문제가 생기는 것도 부담이다. 지난 7일 러시아의 국영 에너지업체 가즈프롬은 우크라이나에 천연가스 공급을 중단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우크라이나 가스의 40%는 러시아에서 수입된다.
러시아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올해 들어 러시아 RTS 증시는 21.4%나 내려앉았다. 이는 올해 세계 증시 기준 최대 하락 폭이다. 러시아 통화인 루블화는 올해 달러 대비 9.7%나 떨어졌다.
유럽과 신흥국 경기도 우크라이나 악재에 자유롭지 못하다.
유럽은 미국과 더불어 호기 좋게 러시아 제재에 나섰지만, 여전히 후환이 두렵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유럽에 에너지 수출을 중단하면 에너지 안보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산 가스의 66%가 유럽으로 수출된다.
특히, 유럽의 맏형 독일은 총 가스 수입의 32%를 러시아에 의존한다. 때문에 러시아 가스 수입 비중이 1% 밖에 안되는 영국이 자신있게 수입처를 미국으로 바꾸자고 주장하고 있지만, 공론화가 되지는 못하고 있다.
에너지 선물 투자로 유명한 티 분 피켄스 BP캐피탈매니지먼트 회장은 "미국이 셰일오일 개발로 다량의 에너지를 확보하긴 했지만, 내수를 제외한 해외에 영향력을 미치기엔 역부족"이라고 평가했다.
신흥국들 또한 우크라이나 사태에 노출돼 있다. 미국이 양적완화 규모를 축소하는 '테이퍼링'을 단행한 여파로 이미 크게 요동친 바 있다. 신흥국 금융시장은 우크라이나 악재로 더욱 위축될 수 있다. 국제유가가 요동치면서 세계경제 회복세가 지연될 가능성도 농후하다.
실제로 지난 1일 러시아가 병력을 크림반도로 이동시켰다는 소식에 터키 리라화 가치는 전일보다 0.88% 하락했다. 폴란드와 헝가리도 줄줄이 떨어졌다. 반면, 수급 불안 탓에 국제유가는 1.20% 올랐다.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극심한 정정 불안이 오는 5월25일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