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여정 (사진제공=NEW)
[뉴스토마토 함상범기자] 배우 조여정은 사랑스러운 이미지다. 그 자체가 갖고 있는 애교도 풍부하고, 그가 맡아왔던 역할도 대체적으로 귀엽거나 여성스러웠다. 영화 '방자전'이나 '후궁'에서는 도발적이고 섹시했다. 여성적인 매력은 어떤 작품을 하든 조여정을 붙어다녔다.
그런 조여정이 매력을 없앴다. 귀여움도 섹시함도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다. 영화 '인간중독'에서의 숙진은 그런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성품이 나쁘지는 않지만 매력이 '꽝'인 여자. 남편을 숨도 못쉬게 만드는 여자가 숙진이다. 보기만해도 매력이 넘치는 조여정은 자신이 갖고 있는 매력을 싹 빼고 완벽히 숙진을 표현했다.
"연기는 조여정이 제일 잘했다"는 말이 돌 정도로 '인간중독'에서 조여정이 보여준 연기는 뛰어났다. 일반인 평을 찾아봐도 조여정의 연기력을 칭찬하는 글이 적지 않게 보인다. 주인공도 아니었고, 분량도 많지 않았음에도 이러한 칭찬을 받기는 쉬운일이 아닌데 조여정은 완벽히 해냈다.
"감독님이 보이지 않았던 나의 숨은 모습을 끌어내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칭찬을 받아 몸둘 바를 모르겠다"는 조여정을 지난 23일 만났다.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러운 느낌의 그에게서 스펙트럼이 넓은 여배우의 미래를 보게 됐다.
◇조여정 (사진제공=NEW)
◇"치밀하고 철두철미하게 계산된 베드신"
영화 초반 조여정과 송승헌은 베드신을 벌인다. "어머나. 어머. 여보. 나 어떡해. 어머. 나 오늘 너무 느꼈잖아"라는 대사가 침대위의 두 사람의 움직임 속에 서 들려오는 그 장면.
예상치 못한 조여정의 행동에 관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언론시사회 현장은 아무래도 영화를 진지하게 봐야하는 기자나 관계자들이 보기 때문에 일반 영화관보다 공기가 무겁다. 웃음도 눈물도 쉽지 않게 터지는 현장이다. 그런 이곳에서 깔깔거리는 관객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김진평(송승헌 분)의 등을 토닥토닥 하는 숙진의 모습에서는 큰 웃음이 터졌다. 진심으로 느끼지 못해 보인 숙진의 표정과 반대되는 대사로 인해 웃음이 나오는 이 베드신을 두고 영화계는 '코믹신'이라고도 하고 "20년간 회자될 베드신"이라고 한다. 이는 철저한 조여정의 계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초 시나리오에서 지문은 '단조로운 섹스를 마친 진평과 숙진'이었다. 조여정은 상황을 고민했고, "말을 계속 떠벌릴 것 같다"며 감독에게 제안했다. 그리고 여러가지 대사를 시험하고, 당일 촬영 전에 대사를 정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장면이다.
조여정은 "저의 촬영이 있기 전에 놀러갔다. 말을 많이 할 것 같다고 하니 감독님이 이런 말 저런 말을 던져줬고, 입에 붙었던 말들이 대사가 됐다. 철저하게 만들어진 대사다. 그렇지 않으면 카메라가 나를 따라올 수 없으니까"라고 말했다.
애드리브처럼 보였다. 그만큼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조여정은 그 누구보다도 진지했다. 대사 연습을 할 때도 웃음기 하나 없이 그 웃긴 대사를 던졌다.
"왜냐면 숙진에게 있어서 아이가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치부니까요. 임신은 일생일대 엄청 중요한 일이에요."
그 때문에 스태프들도 대놓고 웃지 못했다. 입을 막고 숨죽여가면서 웃음을 막으려했다.조여정은 웃음을 정말 잘 참은 송승헌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여러번 찍으면 맛이 안나는 장면이다. NG가 나면 안되는데 승헌 오빠가 정말 잘 참아줬다. OK컷 소리가 나고 '오빠 웃었어?'라고 물어봤는데, 안 웃었다고 답해줬다"라며 웃은 조여정은 "정말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장면이다. 애드리브처럼 보였다는 건 자연스러웠다는 칭찬으로 받겠다"며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조여정 (사진제공=NEW)
◇"김대우 감독님에 대한 신뢰는 끝도 없어"
김대우 감독과 조여정은 인연이 깊다. 오히려 조여정이 김 감독님을 누구보다도 좋아하고 신뢰한다. 영화 '방자전'을 통해 조여정을 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한 장본인이 김대우 감독이기 때문이다.
사실 숙진 역할은 조여정의 이름 값에 비해서는 작은 역할이다. 분량도 적고, 중요성도 송승헌, 임지연이 맡은 역할보다 작다. 다른 배우라면 거부하는 것이 당연해 보이는 이 영화. 하지만 조여정은 '인간중독'을 기회라고 판단했다. 또 김대우 감독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됐다.
조여정은 "스펙트럼을 넓혀야겠다는 생각은 딱히 없다. 주어진 역할에 변화가 있으면 하는 거다. 안 해서 후회하지 말자는 생각 뿐이다. 감독님이 변화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면 안 했을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어 "'방자전'을 했는데 또 제의를 했다. 그건 '내게서 또 무엇을 봤다'는 말이다. 원체 신뢰가 끝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 '나를 또 어떻게 사용해줄까'라는 기대감이 들었다. 완전히 믿고 갔다. 그리고 덕분에 이렇게 칭찬을 많이 받게됐다"며 웃었다.
촬영 전 김대우 감독은 조여정에게 "여정씨가 갖고 있는 목소리톤에서 한 두 단계 낮췄으면 좋겠다. 특유의 사랑스러움을 뺀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단번에 알아들은 조여정은 그렇게 숙진을 만들었다. 아울러 독특한 형태의 안경과 당시를 대변하는 의상이 숙진을 완성하는데 힘을 보탰다.
"톤도 잡아줬어요. 애교스러운 톤을 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거기에 아줌마들이 보여줬던 행동과 말투를 따라하려고 했죠. 완벽한 부부처럼 보이려는 사람들의 모습도 기억했다가 꺼냈고요."
또 하나의 명장면이 있다. 진평의 부하의 아내로 등장하는 전혜진과 신경전 신. 남편의 지위가 군관사 아내들의 지위이기도 한 상황에 전혜진이 조여정의 치부를 건드리는 신이다.
확 돌변한 표정으로 "우리집에 김치 좀 담구러와. 김치 좀 담구는데 온 관사가 떠들썩할 필요가 뭐 있어. 혼자 와"라고 하는 장면이다. 기존에 보지 못했던 카리스마가 터져나온다.
"아마 처음일 거다. 그렇게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은"이라고 말한 조여정은 "감독님이 캐치를 잘 한 것 같다. 가끔 촬영장에서 내가 정색을 확 할 때가 있다. 그 모습을 본 것 같다. 그리고 그 장면을 만든 것 같다. 카메라를 보면서 정말 신기했다. 내가 화 낼 때는 저런 표정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놀라웠다"고 말했다.
한 시간여동안 진행된 인터뷰에서 조여정은 질문에 정면으로 받아쳤다. 노련한 배우들은 기자들과 인터뷰에서 민감한 질문을 요리조리 빠져나간다. 마치 술래잡기를 하는 기분이 들 정도다. 하지만 조여정은 질문에 정면으로 부딪혔다.
조여정은 "원래 그런 성격이다. 그래서 작품을 봐도 좀 센 것들이 있지 않나. 부딪혀보고 싶은 성격 때문에 그렇다"며 "원래 매번 다른 걸 좋아한다. 하고 싶은 것을 안 하고 후회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매번 다른 것을 해보고 싶다는 조여정은 지금 '워킹걸'에도 출연중이다. '인간중독'에서 놀라울 정도로의 연기 변신을 선보인 조여정. 다음 작품인 '워킹걸'이 기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