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눈)정몽구의 10조 결단에 가려진 2300만원

입력 : 2014-09-19 오후 5:03:00
[뉴스토마토 이상원기자] 산업부 기자의 업무 특성상 조(兆) 단위를 심심찮게 봐왔지만 놀라움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10조5500억원. 눈과 귀를 의심했다.
 
사실이었다. 현대차그룹이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 본사 부지 매입을 위해 투찰한 입찰가액은 정확히 10조5500억원이었다. 원 단위부터 무려 12번을 거쳐야 도달하는 단위가 '조'였다. 더 놀라운 사실은 땅을 팔겠다는 사람이 희망한 금액보다 3배가 넘는 천문학적 금액을 써냈다는 사실이다. 재계 1, 2위 간 쩐의 전쟁은 한전만 흡족케 했다.
 
당장 시장에서는 땅 주인이 원하는 값은 물론 경쟁자로 뛰어든 삼성이 써낼 가격조차 모르는 초조한 상황이었지만 "무리한 베팅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컨소시엄을 형성한 현대차그룹 3인방의 주가는 연중 최저치로 곤두박질쳤다. "백년대계를 내다본 결단"이라는 현대차그룹의 적극적 반박도 있었지만 시장의 시선은 야박한 평가에 머물렀다.
 
동시에 각종 커뮤니티에서는 '10조원으로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풍자가 빗발쳤다. 
 
"그 돈이면 이건희 회장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10조6000억원)을 다 살 수 있다"는 것에서부터 "SK하이닉스와 현대증권을 다시 사와서 범현대가를 재건"할 수 있으며, 최악의 국책사업으로 평가받는 "4대강 사업 중 2개 강을 정비할 수 있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전 국민에게 21만원씩 나눠줄 수 있다는 말은 애교 수준이었으며, 전 국민이 두 달 동안 짜장면을 먹을 수 있다거나, 소주 88억병,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25억잔, 통닭 5억2500만마리를 살 수 있다는 생활형 유머들도 쏟아졌다. 너도나도 동그라미(0)를 그리고, 또 그렸다.
 
오늘날의 현대차를 있게 한 쏘나타를 35만2843대(최고급형)를 살 수 있는 수준이자, 현대차 전 임직원 6만3099명의 2년치 총 급여에 해당하는 금액이기도 하다. 또 현대차가 쏟아붓는 6년치 연구개발비에 해당한다. 신형 LF쏘나타에 총 4500억원의 개발비가 투입된 점을 감안하면 쏘나타급 신차 23종을 추가 개발할 수 있다.
 
현대차가 이날 부담키로 결정한 비용은 10조5500억원에 그치지 않는다. 최소 5조원 수준의 토지 개발비와 썰물처럼 빠져나간 시가총액 8조원 가량을 감안하면 20조원을 훌쩍 넘긴다. '그 돈'으로 먹을 수 있는 소주는 176억병, 스타벅스 아메리카노는 50억잔으로 불어난다.
 
일각에서는 "화끈하다"거나 "돈을 쓰려면 저 정도는 써야지"라며 입찰가 최종 결정권자였던 정몽구 회장의 통 큰 리더십을 칭찬하는 얘기들도 이어졌다. 과거 줄곧 재계 1위였던 현대의 자존심이 이번에 제대로 살아났다든지, 현대건설 인수 진통의 트라우마를 제대로 씻어냈다는 자위도 뒤따랐다.
 
쇳물부터 완성차까지 수직 계열화를 위한 정 회장의 강한 의지는 현대제철을 포스코에 이은 제2의 일관제철소로 재탄생시켰고, 잃어버렸던 적통성은 계동 사옥을 접수하면서 기쁨의 눈물과 함께 되찾았다. 통합사옥이라는 마지막 남은 숙원은 그에게 10조원이 넘는 베팅액에도 '콜'할 수 있는 자신감을 불어넣었을 수도 있다.
 
반대로 현대차그룹 계열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만 29조원이 넘기 때문에 시장에서 우려하는 '승자의 저주'는 없을 것이라는 반론도 근거는 충분하다. 해당 부지를 어떻게 탈바꿈시키느냐에 따라 세계 5위 자동차 메이커인 현대차그룹의 위상이 한층 제고될 수도 있다. 벤치마킹을 넘어 한국형 '아우토슈타트'로 일궈낼 경우 창출해 낼 부가가치 또한 천문학적이다.
 
이 같은 논란을 뒤로 하고  정 회장이 과연 누구의 돈으로 이처럼 통 크고 화끈한 결정을 할 수 있었는지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설사 미래를 내다본 혜안이었다 할 지라도 과정 속에 무시된 여러 이들의 이해관계는 현대차를 괴롭히는 주홍글씨가 될 수도 있다.
 
현대차그룹이 동원 가능하다고 밝힌 현금이나 현금성 자산은 엄연히 13만명이 근무하고 있는 현대차그룹 공동체의 자산이며, 8조원 넘게 잃어버린 시가총액의 주인은 정 회장과 함께 현대차그룹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수많은 주주들이다.
 
공교롭게도 정 회장이 화끈하게 10조원을 베팅한 날 서울 서초동 법원에서는 현대차로부터 10년 동안 밀린 임금 2300여만을 받게 된 비정규직 근로자 994명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들에게는 '조' 단위는 관심도 없었다. 그저 생존의 문제였고, 이를 도외시한 현대차에 대한 원망만 가득했다.
 
정 회장의 결정 하나가 미치는 파장은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이번 결정이 '황제경영'의 폐단으로 돌아오지 않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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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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