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윤석진기자] 스위스 중앙은행(SNB)이 3년이 넘도록 유지해온 환율하한선을 철폐하자 세계 금융시장이 일제히 요동쳤다.
SNB의 깜짝 행보에 놀란 투자자들이 안전자산을 매입하기 시작하자 스위스 증시를 비롯한 각국 증시가 곤두박질쳤다.
전문가들은 SNB의 이번 조치로 스위스 수출 기업이 타격을 입을 수 있다고 전망하는 한편, 유럽중앙은행(ECB)의 국채매입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SNB, 1.20스위스프랑 최저환율제 '폐기'.."항복 선언"
스위스 중앙은행(SNB)은 15일(현지시간) 지난 3년 4개월간 지켜오던 유로당 1.20스위스프랑의 하한선을 폐기하겠다고 밝혔다.
◇토마스 조던 SNB 총재가 통화정책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로이터통신)
토마스 조던 SNB 총재(
사진)는 기자회견을 통해 "최저환율제는 스위스 경제를 안정시키고 수출업자들에게 기회를 제공했다"며 "그러나, 이 정책은 이제 선택사항에서 제외됐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날 결정은 시장을 놀라게 할 것"이라며 "환율하한제는 오래갈 정책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SNB는 지난 2011년 9월 유로존 재정위기를 피해 모여드는 자금으로 스위스프랑 가치가 절상되는 것을 막고자 사실상 고정환율제나 다름없는 최저환율제를 도입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스위스프랑이나 유로화나 모두 달러 대비 약세를 이어가 최저환율제를 고집할 정당성이 사라졌다는 분석이다.
통화가치 방어차원에서 사들인 유로화가 너무 많아 비용이 늘어난 것도 문제다. 지난 2011년 중반 2000억스위스프랑이던 외환보유고는 지난해 12월 4851억스위스프랑으로 급증했다. 이는 스위스 국내총생산(GDP)의 70%에 해당하는 규모다.
이런 상황에서 ECB의 추가 부양으로 유로 약세·스위스프랑 강세 구도가 강화되면 그 방어 비용이 걷잡을 수없이 늘어날 것으로 판단해 선제 행동에 나섰다는 분석이다.
대부분의 경제 전문가들은 ECB가 오는 22일 정례 통화정책회의에서 미국식 양적완화(QE), 즉 국채매입을 단행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ECB의 국채매입으로 유로화 가치가 내려가면 SNB는 최저환율에 따라 스위스프랑 강세를 방어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스위스프랑을 시중에 풀어야 한다. 이는 통화 안정을 위해 이미 수십억 스위스프랑을 쓴 SNB에게 매우 부담되는 일이다.
제레미 쿡 월드퍼스트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SNB가 사실상 항복을 선언한 것"이라며 "ECB의 국채매입으로 유로화 가치가 더 내려갈 것이란 전망에 부담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더불어 SNB는 이날 기준금리인 3개월 리보를 마이너스(-)0.25%에서 -0.75%로 0.50%포인트 낮췄다. 스위스프랑화 매수 의지를 꺾겠다는 포석이다.
이와 관련해 알렉스 드라이덴 JP모건애셋매니지먼트 글로벌 마켓 전략가는 "스위스프랑의 안전통화 이미지를 희석하려는 전략"이라며 "이건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행보"라고 말했다.
◇글로벌 금융권 '패닉'..안전자산 쏠림 현상
SNB의 행보는 시장 참여자들을 패닉으로 몰았다. 자연히 글로벌 자금은 위험자산에서 안전자산 쪽으로 이동했다.
파이낼셜타임즈(FT)는 세계적인 저금리 기조, 부진한 원자재 시장, 러시아 루블화 폭락 등의 악재를 우려하던 투자자들이 안전자산을 매수하기 시작했다고 진단했다.
특히, 대표전인 안전자산인 달러와 엔화 강세가 두드러졌다.
전일 117엔대에서 거래되던 달러·엔 환율 이날 116엔 초반대까지 내려갔다. 같은 날 주요 6개국 통화가치 대비 미국 달러화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는 92.28로 전일의 92.07에서 상승했다.
전통의 안전자산인 스위스프랑화도 강세를 나타냈다. 스위스 프랑화 가치는 유로대비로 장중 40% 이상 급등하기도 했다.
국채시장에서는 미국 30년 만기 국채가 인기를 끌며 수익률이 전일보다 0.09% 내려간 2.371%를 기록했다. 이는 역대 최저치다. 5년 만기 미 국채 수익률도 0.16% 하락한 1.161%로 집계됐다.
반면, 스위스 증시는 14% 급락하며 지난 1989년 이후 최대 낙폭을 기록했다. 통화강세로 스위스 수출 기업 실적이 악화될 것이란 전망에 주가가 일제히 하락한 것이다.
아울러 헝가리와 폴란드 등 동유럽 증시도 위험회피 심리 확대로 나란히 하락했다. 미국 증시에서는 S&P500지수가 한 달 만에 처음으로 2000선 밑으로 후퇴했다.
◇SNB, 스위스 경제 위기 불러..전세계 금융권 불확실성 휩싸여
전문가들은 SNB의 결정이 스위스 수출 업자들과 전체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스위스 전체 수출에서 유로존이 차지하는 비중이 50%에 이르기 때문에 프랑화 통화절상은 국가 경제에 매우 큰 부담이다. 유로 대비 스위스프랑화 가치가 올라가면 스위스 기업은 유로존 기업과의 가격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제임스 스탠턴 드비어 그룹 외환 대표는 "스위스프랑이 이대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면 수출 상품 가격은 30%가량 비싸질 것"이라며 "스위스 기업 주가도 이런 우려에 곤두박질쳤다"고 말했다.
스위스 수출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번 조치로 스위스프랑 강세가 가속화되면 관광산업이 위축되고 물가 하락 현상이 심화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조지 매그너스 UBS 수석 경제자문 위원은 "SNB의 조치는 올해 경제 성장률을 0.7% 갉아먹을 것"이라며 "스위스는 경기침체(디플레이션)을 피하고 수출, 관광산업 경쟁력을 재고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UBS의 비트 시젠탈러 이코노미스트 역시 “유로·스위스프랑 환율이 1.20스프랑 내외에서 안정을 찾지 못할 경우 이번 중앙은행의 결정이 실물경기에 상당한 충격을 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 세계 금융권이 불확실성 속에 휩싸일 것이란 경고도 줄줄이 나왔다.
SNB를 시작으로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돌발 행동에 나서면 시장의 불확실성이 더욱 확대될 것이란 점에서다.
미 연준의 경우, 올해 중순쯤에 기준금리를 전격 인상할 것이란 의견이 중론이나, 이마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일부 전문가는 SNB가 ECB의 양적완화 기조에 맞서기 위해 기준금리를 또 한차례 내리리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총재(사진)는 "SNB의 조치에 좀 놀랐다"며 "연방준비제도(Fed)가 통화 완화를 중단하고 일본은행(BOJ)과 ECB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임에 따라 자본 흐름과 환율의 변동성이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키트 주크스 소시에테제네랄 글로벌 투자 전략가는 "변동성이 확대될 것"이라며 "시장은 현재와는 다른 흐름에 직면할 것이며 각국 경제와 통화정책의 격차 역시 커질 것"이라고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