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보 국민권익위원장이 4일 오전 종로구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합동브리핑룸으로 '김영란법' 국회 본회의 통과와 관련한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들어오고 있다.ⓒNews1
[뉴스토마토 이상원기자] 재계가 김영란法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의 대상이 공직자와 언론인 등으로 압축됐지만, 정작 금품과 청탁의 제공 역할을 해왔던 기업의 역할 또한 축소 또는 변경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재벌을 비롯한 상당수 기업들은 '대관' 업무라는 역할을 별도로 전담하는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국회를 비롯해 정부부처에 상주하면서 국회의원이나 보좌관, 공무원 등을 만나 식사나 술자리 등을 하면서 정보를 얻어내는 역할을 한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청탁이 오가고, 대가로 금품 등의 현물이 지급된다. 또 상당수 기업들이 설과 추석 등 명절마다 정치권과 정부기관, 언론 등에 선물을 뿌린다. 골프접대 등도 주요 업무 중 하나다.
대관업무는 해당 기업에 불리한 법안 및 정책을 막거나 유리한 법안과 정책을 추진시키는 데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때로는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는 발판이 된다. 일종의 로비 창구다. 스스로를 가리켜 '음지'라고 칭한다. 대관에서 밀릴 경우 경영실적에서 참패를 맛보기도 한다. 특히 총수 일가가 검찰 수사선상에 오르거나 여론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논란에 휩싸일 경우 대관은 홍보와 더불어 주요 방패막이 역할을 해내야 한다.
대기업의 경우 천문학적인 규모의 금액을 이런 대관업무에 지출한다. 통칭해 접대비다.
국세청에 신고된 기업들의 접대비 수준은 9조원을 넘어선 지 오래다. 기업법인세 중 접대비 규모는 2009년 7조5000억원에서 2011년 8조3500억원으로 불었고, 2013년에는 9조원을 돌파했다. 수치로 드러난 접대비 외에 청탁 대가로 지급되는 뒷돈까지 더하면 금액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일 것이란 게 재계의 통설이다.
필요에 의해 혹은 마지 못해 '관행'처럼 해왔지만, 모두들 합법적으로 해왔던 일이다. 업무 유관성이나 청탁의 유무를 떠나 대부분 접대비라는 항목구분을 통해 정상적으로 회계처리됐다.
그러나 신설된 김영란법을 적용하면 불법이 된다. 처벌기준으로 정해진 1회 100만원, 연간 300만원을 넘기지 않아야 하고, 그 이하의 경우라도 업무 유관성이 없는 자리만 접대비 지출이 가능하다. 대폭적인 변화가 불가피한 이유다.
일부에서는 벌써부터 쪼개기나 현금 결제, 상품권 성행 등 법망을 피할 갖가지 편법을 우려하고 있다. 100만원 한도를 넘지 않기 위해 결제를 쪼개서 하거나 택배주소 등 증빙이 남는 선물보다는 직접 전달하기 쉬운 상품권 등으로 수요가 옮겨갈 것이라는 얘기다. 법인카드 대신 현금도 주요 결제 수단이 될 수 있다.
한 대기업 그룹 관계자는 "실제 시행되는 것을 지켜봐야 하겠지만, 사실상 대관업무가 어렵게 됐다고 봐야 하지 않겠느나"며 "기업 쪽에서도 정책 진행상황 등을 파악하기 위해 공무원을 만나는 경우가 많은데 그쪽(공무원)에서 미리 만남을 꺼려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업무 유관성이나 대상에 대한 모호함도 기업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모 대기업 그룹의 경우 법안이 국회를 통과한 직후 대관 담당자들이 긴급회의를 소집해 대응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한 대기업 고위 관계자는 “여러 위헌 소지가 많아서 손을 좀 많이 댈 것 같이 얘길 하더니 전격적으로 통과가 됐더라”며 “법 본래의 취지는 부정하기 어렵지만 (시행방안에 대해서는) 좀 애매한 부분이 많다”고 평가했다.
이는 비단 대관 업무에만 그치질 않는다. 기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홍보 업무에도 일대 변혁이 불가피하다. 대기업에서 홍보 업무를 총괄하는 한 고위 관계자는 "골프나 술은 고사하고, 기자들하고 밥도 못 먹게 생겼다"고 말했다. 다른 기업의 홍보 관계자는 "오너 쪽에서 문제가 터져 나오면 이제 하소연조차 하기 어렵게 됐다"며 "목줄이 달린 일인데, 난감하게 됐다"고 토로했다.
한편으로는 김영란법이 기업들의 불필요한 접대비를 줄여 오히려 경영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한 그룹사 관계자는 “접대비는 필요에 의해 지출된 경우도 있지만 불필요하게 지출된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며 “사회가 투명해지는 효과만큼 기업들이 불필요한 경비를 줄이는 효과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