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2년 3월 이재현 CJ그룹 회장 미행 의혹 사건과 관련해 삼성물산 감사팀 소속 김 모 차장이 서울 중부경찰서에서 소환조사를 받고 귀가하고 있는 모습. ⓒNews1
[뉴스토마토 임효정기자] 삼성이 또 다시 불법사찰 논란에 휩싸였다.
민원인과 노조원을 불법 사찰한 증거가 속속 드러나면서 삼성을 향한 여론의 시선도 극히 냉랭해졌다. 잊을 만하면 재발되는 삼성의 반복된 행태에, 전문가들은 "오너의 중대결심 없이는 변화가 어렵다"는 반응이다. 더 이상 조직의 자정(自淨)에 맡길 수 없을 정도로, 과거와의 단절은 어렵게 됐다는 진단이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은 16일 "이 같은 문제에 대해 재벌들도 알고 있다. 하지만 문제에 대한 인식과 실제 행동은 매우 괴리돼 있다"면서 "이는 회사 이익이나 주주의 목소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실무자 입장에서 임원이나 사장에게 조금의 불편도 끼치지 않게 하려는 과잉충성 탓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삼성 뿐만이 아니라 이미 재벌그룹들의 조직문화에 깊숙히 뿌리박혀 있다"며 "잘못된 관행이 반복되는 것을 막는 내부통제를 갖추는 데는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권오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제정책팀장은 "삼성이 황제경영 체제이다 보니 계속 이 같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작업 가운데서 이번 사찰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나 윤리경영 차원에서도 민간인을 사찰했다는 것은 상당히 심각한 일"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이어 "근절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처럼 말뿐인 것에 그칠까 우려스럽다"며 "단호하게 제재하는 사회적 장치도 없기 때문에, 이 같은 일은 언제든 또 다시 반복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재계는 삼성이 차지하는 위상 등을 감안해 대놓고 불만을 표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우려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총수 리스크를 안고 있는 기업들은 혹시나 불똥이 튈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땅콩회항 사건으로 (재벌)기업을 보는 여론이 극도로 악화된 상황에서 이 같은 일이 터져 당혹스럽다"고 말했고, 홍보 일선에서 움직이는 다른 그룹사 관계자는 "마름(지주를 대리하여 소작권을 관리하는 사람) 입장이 되다 보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고 말했다.
삼성 내부에 정통한 또 다른 관계자는 "사건이 터졌을 때 일벌백계하는 삼성의 조직문화 특성상 관리자 입장에서는 무엇이든 미연에 예방하고 나설 수밖에 없다"며 "이를 묵인하는 고위선의 암묵적 동의가 더해지면서 일종의 관행이 습관처럼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파문이 불거지자 야당과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삼성에 대한 힐난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김영록 새정치연합 수석대변인은 "노조 사찰 의혹 제기는 셀 수 없을 정도다. 삼성의 민간인 사찰은 피해자 입막음과 보여주기식 사과 등 ‘급한 불끄기’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라며 "미행과 사찰은 명백한 불법행위로, 사법당국의 철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통해 본분을 망각한 재벌기업의 행태를 엄단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김종민 정의당 대변인도 "삼성의 이 같은 행태는 이미 수차례 적발된 바 있으나, 안타깝게도 자칭 글로벌 초일류기업 삼성은 여전히 그 나쁜 버릇을 못 고치고 있다"며 "삼성의 이 같은 행태는 명백한 불법행위로, 사법당국의 철저한 진상 규명과 그에 따르는 엄중한 처벌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참여연대도 계속되는 삼성 사찰 문제와 관련해 삼성바로잡기운동본부 측과 논의한 후 강경하게 대응한다는 계획이다. 안진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삼성이 사찰하고 미행한 적은 한두번이 아니다. 민원인 집까지 사찰하는 일까지 발생했다"며 "삼성바로잡기운동본부 측과 논의해서 고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앞서
삼성물산(000830)은 주주총회가 있던 지난 13일 민원인이자 소액 주주에 대한 밀착 감시에 나선 것으로 밝혀졌다. 이날 삼성물산 고객만족(CS)팀 직원 27명이 모인 단체 카톡방에는 5년째 삼성물산에 소음 피해를 호소하는 민원인을 미행한 내용이 적나라하게 기록돼 있다. 대화창에는 "세대 불이 안 켜져 있음", "하얀 점퍼, 검은 바지, 흰 운동화", "현재 길음역" 등 민원인의 옷차림과 동선 등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공유됐다.
이 같은 대화내용이 공개되자 삼성물산은 민원인 사찰을 인정하고, 블로그를 통해 공식 사과했다. 사과문에는 "저희 임직원들이 주주총회 준비과정에서 민원인의 동향을 감시하는 매우 잘못된 행동을 했다"며 "바로 사실관계 파악에 나서 이 사건의 책임자인 주택본부장을 보직 해임 조치했다"고 말했다. 다만 실무선의 책임으로만 돌릴 뿐, 윗선으로부터 구체적 지시 등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그러나 이 같은 삼성의 반론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해당 대화창에는 삼성의 보안전문 계열사인 에스원 직원들이 전국금속노동조합 경남지부
삼성테크윈(012450)지회 간부의 시위 동향을 보고하는 내용도 들어 있어, 이번 사찰이 그룹 차원에서 이뤄진 조직적 움직임 아니냐는 반론에 대응하기 어렵게 됐다.
이 같은 감시와 불법사찰 논란은 비단 어제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특히 상속소송 과정에서 범삼성가의 일원인 이재현 CJ그룹 회장마저 미행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노조에 대한 불법사찰 논란은 그 수위를 가늠키 어려울 정도라는 게 노동계의 주장이다. 특히 지난해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S그룹 노사전략' 문건을 공개하면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최지성 삼성 미래전략실장(부회장) 등이 노조법 위반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 당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