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임애신기자]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 외국계 헤지펀드인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반대로 인해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개 속에 빠져들고 있다.
엘리엇 매니지먼트는 지난 1977년 미국의 폴 싱어가 설립한 세계 최대의 헤지펀드 중의 하나로, 260억달러(약 30조원) 규모의 자산을 운영하고 있다.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 경영권 변경을 요구하거나 기업 및 국가 상대 소송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기로 유명하다.
현재 삼성측이 삼성물산 지분 13.59%를 보유하고 있는 가운데 엘리엇이 7.12%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최대주주는 국민연금으로 9.98%를 보유 중이다.
삼성과 엘리엇은 다음달 17일로 예정된 합병 임시주총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우호지분 확보에 여념이 없다.
엘리엇이 해외투자자들에게 지분 추가 매입을 당부한 가운데, 0.26%를 가진 네덜란드연기금(APG) 등은 이미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삼성물산은 이에 맞서 KCC를 우호세력으로 끌어들인 상태다. KCC는 지난 8일 삼성물산 주식 0.2%를 시장에서 매입했다. 의결권 행사를 위한 지분 매입 시한은 9일자로 만료됐다.
엘리엇이 합병을 반대하는 논리는 이렇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주식 교환 비율이 삼성에 유리하게 책정됐다는 것. 삼성물산이 보유한 계열사 15곳의 주식가치가 11조~12조원 수준인데 9조원밖에 평가받지 못했다는 입장이다.
엘리엇이 지난 9일 서울중앙지법에 합병 결의 주주총회 결의 중지 가처분 신청을 낸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다음달 17일 열리는 임시 주주총회에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안을 결의하지 못하게 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엘리엇은 "제일모직과 합병안이 명백히 공정하지 않고 삼성물산 주주들의 이익에 반한다"며 "주주들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조치"라고 소송 배경을 밝혔다.
일부 소액주주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근 인터넷에 '삼성물산 소액주주연대'(cafe.naver.com/black26uz3) 카페를 개설, 10일까지 1600여명이 회원으로 가입했다.
카페 운영자 '독타맨'은 "계란으로도 바위가 깨진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며 소액주주의 권리를 행사하자는 공지글을 올렸다. 340여명의 소액주주들이 47만3000여주를 엘리엇 측에 위임하거나 위임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이는 삼성물산 전체 주식수 대비 0.28%에 해당된다.
한 소액주주는 "삼성은 합병 시너지가 60조원에 달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경영승계 목적이 아니고선 사업적으로 합병할 이유가 없다"며 "결국 삼성일가의 경영 세습을 위해 소액주주들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삼성물산 측은 합병비율 책정 절차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주가가 낮은 시점을 고의로 선택해 합병 비율을 결정했다는 엘리엇 측의 주장에 대해 "합병비율은 지난 수 년간의 건설 경기침체와 업황 회복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 따른 주가 하락에 기인해 책정했다"고 반박했다.
법조계 관계자는 "법에 근거해서 산출했기 때문에 합병비율은 적법할 것"이라면서도 "주요 주주가 무리한 합병 추진으로 재산상 손실을 봤다거나 배임을 주장할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했다.
삼성이 승소한다고 해도 변수는 남아 있다. 엘리엇이 투자자-국가간 소송(ISD) 독소조항을 활용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ISD는 해외 투자자가 투자대상 국가의 법령이나 정책으로 피해를 볼 경우 국제 중재를 통해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는 분쟁해결 제도로 자유무역협정(FTA)에 포함돼 국내법보다 우선한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이 삼성의 취약한 지배구조상 예견됐던 문제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2003년 SK그룹의 소버린 사태와 2004년 헤르메스의 삼성물산 공격, 2006년 칼 아이칸의 KT&G 공격 등과 비슷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삼성물산은 삼성전자 지분 4.1%를 보유하고 있다. 총수 일가가 보유하고 있는 삼성전자 보유지분은 13.2%에 불과하기 때문에 삼성전자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삼성물산의 경영권 방어가 필수적이다.
윤태호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삼성이 삼성물산 경영권 없이 지배력을 유지하려면 8조원의 자금이 필요한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엘리엇이 삼성의 약점을 정확히 꼬집었다"고 분석했다.
자본시장 관계자는 "우리경제에서 삼성의 비중이 점점 커지면서 그들의 세습을 당연시한 경향이 있다"며 "출자구조를 변경하고 부당이득 취득, 신주인수권부 사채(BW) 저가 인수 등의 관행이 타파돼야 제2의 SK사태를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임애신 기자 vamos@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