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취업시장에서 '찬밥'…대기업 이공계 편중 심화

18개 대기업 지난해 신입 공채 전공별 분류…이공계 80% 이상 절대적
인문계 출신 55% "전공, 취업에 도움되지 않아"

입력 : 2015-07-14 오후 1:24:14
삼성의 공채시험 직무적성검사(SSAT)가 치러진 현장 모습. 수험생들이 시험을 마친 뒤 고사장을 나서고 있다. 사진/뉴시스
 
취업을 포기한 취업준비생 '취포생', 20대에 이미 퇴직한 백수 '이퇴백', 인문계 90%가 논다는 '인구론'. 지난 수년간 우리나라 취업 준비생들 사이에서 생겨난 신조어로, 취업 시장의 냉혹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인문학 전공자들의 취업 성공기는 주위에서 찾아보기 힘들 만큼 청년실업의 절대적 다수를 이루고 있다. 최근 사회 전반에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다지만, 현실에서 인문계 전공자들에 대한 구직의 온기는 식은 지 오래다.
 
여기에는 변화된 산업구조가 큰 몫을 차지한다. 전기전자·IT·자동차 등 첨단기술을 요구하는 산업 분야가 주류로 자리하면서 인문계 출신들이 설 자리는 극히 좁아졌다. 그나마 있던 인사·노무·총무·회계·홍보·영업 등의 직무도 이공계 출신들로 채워지고 있다. 이렇다 보니 인문계 출신은 구조조정 때마다 퇴출 0순위로 지목되며 두려운 마음을 안고 살아야 한다. 불과 2000년대 초반 이공계 기피 현상을 떠올리면 상전벽해다.
 
인력을 공급 받는 기업들이 이공계 출신을 크게 선호하면서 대학도 상아탑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인문대 강의실은 비어있는 경우가 허다하고, 그나마 자리를 채우고 있는 학생들마저 전과를 고려하는 등 취업 준비에 여념이 없다. 인력 수급의 균형이 무너진 데다, 수요가 불규칙하게 한 곳으로 몰리면서 공급자인 대학가의 상황도 급변했다. 취업이 삶의 목표가 되면서 양극화는 전공 분야로까지 비화됐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로 인한 국가 철학의 부재에 있다. 역사와 철학적 바탕 위에서 시대가 직면한 문제를 깊이 있게 고민하고 새로운 미래 비전 제시를 통해 이해관계 조정과 사회 통합을 이뤄내야 할 인문학적 뼈대가 약해졌다는 얘기다. 효율이 제1의 가치가 되면서 정치도, 경제도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는 전문가들의 경고를 마냥 지나칠 수만은 없게 됐다. 인문학이 소외되면서 국가도 길을 잃고 있다.
 
◇조사대상 18개 대기업 이공계 출신 80% 이상
 
취재팀은 '인문 및 이공계 출신의 취업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지난 한 달 간 국내 주요 대기업의 현황 조사에 착수했다. 각 산업을 대표하는 기업들을 선정한 뒤, 이들 기업의 분기보고서(2015년 1분기)를 분석하고,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대다수 기업들은 인사라는 이유를 들어 전공별 공채 최종 합격 비율 등 구체적 자료 공개를 꺼려했다.
 
삼성은 지난해 11월 삼성전자와 삼성SDI, 삼성생명 등 25개 계열사에서 5000여명의 하반기 신입 공채를 선발했다. 이중 삼성전자는 전체 채용인원의 85% 정도가 이공계 출신으로 채워졌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IT 기업이기 때문에 이공계 출신 전공자가 다른 기업보다 상대적으로 많을 수밖에 없다”면서 ”구체적 수치는 보기에 따라 오해를 살 수 있어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기업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지난해 신입 공채의 이공·인문계 비율은 8대 2 수준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이공·인문계 출신 채용 비율이 수시로 바뀌지만, 대략 7대 3 정도”라면서 “지난해처럼 R&D(연구개발)를 강화할 경우 80%까지 이공계 출신이 늘어나고, 수시채용의 경우 인문계가 40%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고 귀띔했다. LG전자 고위 임원은 "9대 1 수준으로까지 올라왔다"며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인문대를 나오는 것보다 지방대 공대를 나오는 게 입사에 유리한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주)한화도 지난해 기준 8.3(126명)대 1.7(25명)의 비율을 보였다. 한화케미칼도 이와 비슷한 8.6(43명)대 1.4(7명)의 비율을 보였다.
 
석유화학, 건설, 철강, 중공업 등 이른바 굴뚝산업에서도 이공계 출신이 확연히 눈에 띈다. 지난해 기준 신입 공채 인원을 이공·인문계열 별로 분류하면 현대건설이 8.3대 1.7, 대림산업 9.5대 0.5, 대우건설 6.4대 3.6의 비중을 보였다. 반도체 기업인 SK하이닉스는 무려 800명 중 780명이 이공계 출신으로 98%의 절대적 비중을 보였고, 효성 7대 3, 한화케미칼 8.6대 1.4, 금호석화 7.8대 2.2의 비율로 확인됐다.
 
철강을 대표하는 포스코와 현대제철이 각각 7대 3, 8대 2의 비율을 보인 가운데, 조선사인 삼성중공업도 8.5대 1.5로 조사됐다. 우리나라 대표 통신기업인 SK텔레콤이 5대 5의 비율로 균형점을 맞춘 가운데, 서비스업을 주력으로 하는 CJ는 4대 6의 비율로 인문계가 강세를 보였다. 해운사인 현대상선은 오히려 9(인문5.5·상경3.5)대 1로 이공계 비율이 현저히 낮았다.
 
◇주요 대기업 임원 및 신입공채 이공·인문계 비율. 자료/뉴스토마토
 
기업들은 이 같은 이공계 편중에 대해 현실론을 든다. 산업이 고도화되면서 차별화된 기술력과 발빠른 대응이 글로벌 시장에서의 성패를 가늠하는 잣대가 됐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때문에 기업들은 제품의 연구개발(R&D)에 역량을 집중할 수밖에 없고, 이는 인재 선발에 있어 우선적 고려대상이 된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기업은 위기 상황일 때도 연구개발을 멈출 수 없다"며 "기술에 대한 전문성은 (입사를 위한)필수 덕목"이라고 말했다.
 
◇대기업, 임원진 전공 출신 따지지 않아
 
대졸 신입사원 공채와 달리 전무급 이상 임원 비율 면에서는 전공별 차이가 크지 않았다. 고위 임원 대부분이 30년 이상 장기 근무했다는 점에서 예전 인문계의 강세가 확인된 데다, 인문계 출신을 임원급 이상으로 앉히는 것에 대해 기업의 눈은 그리 박하지 않았다. 물론 이공계의 임원 진급 비율은 인문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추세임은 분명했다.
 
삼성전자 전무급 이상 고위 임원 총 197명 가운데, 인문계(인문·사회과학·상경 포함)는 70명(35.5%)으로, 이공계 76명(38.5%)과 큰 차이가 없었다. 미분류 및 기타는 51명(25.9%)으로 조사됐다. 다만 사회과학 및 상경 계열을 제외한 순수 인문계 출신은 이재용 부회장(서울대 동양사학과)과 이인용 사장(서울대 동양사학) 등 10여명에 불과했다. 권오현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은 전기공학도 출신이며, 삼성전자의 양 축인 가전과 휴대폰을 맡고 있는 윤부근 사장과 신종균 사장은 각각 통신공학과,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반도체사업을 총괄하는 김기남 사장도 전자공학과 출신이다.
 
전무급 이상 고위 임원 비중은 삼성전자와 마찬가지로 현대차(총 86명 중 인문 31명, 이공 36명), 기아차(총 36명 중 인문 19명, 이공 15명), NAVER(총 32명 중 인문 14명, 이공 16명), GS칼텍스(총 17명 중 인문 7명, 이공 9명), KT(총 27명 중 인문 12명, 이공 13명) 모두 인문·이공계 출신 비율이 비슷하게 나타났다.(단, 전공 파악이 어려운 경우 기타로 분류)
 
SK하이닉스(총 21명 중 인문 4명, 이공 17명), 포스코(총 23명 중 인문 8명, 이공 15명), 삼성중공업(총 20명 중 인문 4명, 이공 15명), LG전자(총 84명 중 인문 26명, 이공 44명)는 이공계 출신이 임원진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 사회과학과 상경계열을 인문계열에서 제외할 경우 격차는 더 벌어졌다. 반면 S-Oil(총 18명 중 인문 11명, 이공 7명)은 전무급 이상 고위 임원진을 분석한 결과, 인문계 출신이 강세를 보였다.
 
◇인문계 출신 55% "전공, 취업에 도움되지 않아”
 
취재팀은 지난 6일부터 9일까지 나흘 간 수도권 직장인(입사 2년차 이내)과 취업준비생 총 104명을 대상으로 '대학 학과 만족도 조사'를 진행했다. 설문은 개별 면접조사로 이뤄졌다.
 
조사 결과, 인문계(인문·상경·사회과학) 출신 절반이 넘는 55%가 ‘전공이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아 학과 선택에 후회하고 있다’고 답했다. 또 인문계열 응답자 중 67.2%는 다시 대학에 진학할 경우 ‘지금의 전공을 선택하지 않겠다’고 답해, 학과 만족도가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중 다시 대학에 입학할 경우 ‘공학계열 학과를 선택하겠다’는 답변이 53.5%로 가장 높았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더 좋은 조건으로 취업하기 위해서’라는 응답이 62.8%를 차지했다.
 
게다가 인문계 출신은 입학 당시 향후 '취업'(7.9%)을 고려하기 보다 ‘적성(39.1%)’과 ‘성적(34.4%)’에 따라 학과를 선택하다 보니, 정작 대학 진학 이후에는 취업 걱정에 전공에 소홀했다. 적성에 따른 전공 선택보다는 대학의 문패를 우선시하는 학벌 문화가 여전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대학 학과 만족도 조사. 자료/뉴스토마토
 
대학들 역시 문학·철학·사회과학·순수예술 등 취업 경쟁력이 없는 학과를 통폐합하고,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학과나 강좌로 일관하고 있다. 학문의 다양성과 깊이를 추구해야 하는 대학이 취업률이라는 잣대로 본연의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는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물론 대학들로서는 이공계를 중심으로 신입사원을 선발하는 기업 풍토와 취업률 없이는 학생 유치 및 정부 지원에 한계가 있다는 현실적 이유를 들고 있다.
 
앞서 지난 4월 대학내일20대연구소가 발표한 <2015 전국 대학 학과 통폐합 현황 보고서>에서도 이 같은 대학의 변화는 드러난다. 2010년부터 2015년까지 최근 6년간 수도권 대학의 전공별 단순 폐과 사례는 270건으로, 이중 인문(사회계열 포함)이 절반(135건)을 차지했다. 이어 자연계 79건(30%), 예체능계 56건(21%) 순으로 조사됐다. 지방 대학까지 포함할 경우 폐과 사례는 더 늘어난다. 상대적으로 취업률이 떨어지는 인문·사회계열과 순수예술이 학과 통폐합의 1차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 어떻게 볼 것인가
 
이에 대해 류병래 충남대 인문대학장은 "대학 내에서 인문학은 죽어가거나 계륵으로 방기되고 있다"며 "교육당국의 평가기준 중 취업률과 SCI 논문 게재 실적 등 정량적 평가에서 이공계에 밀려 통폐합 대상 0순위"라고 말했다. 이공계에 편중된 정부 정책에 대한 지적은 계속됐다. 그는 "올해 정부의 R&D 예산은 총 18.9조원인데, 인문사회 분야에는 4.2%인 7935억원만이 배정됐다. 나머지 18조1296억원은 과학기술 분야"라며 "'과학입국'의 구호와 시책이 국가 발전에 기여해 왔음을 부정하진 않지만, 나라의 경제적 수준과 위상이 높아진 만큼 인문사회 분야에 대해서도 적정한 비율의 재정적 지원을 시작, 선진국형 연구지원 제도를 정착시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성공회대 교양학부 겸임교수)는 구조적 관점으로 접근했다. 그는 “자본주의의 발전과 기업 중심으로 사고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인간 중심의 인문학이 점점 더 설 자리를 빼앗기고 있다”며 “단순히 하나의 학문 체계가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과 문명이 인간을 소외하는 상황이 상시화되고, 구조화됐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취업의 어려움과 실직, 비정규직 등의 문제 자체가 비인간적이고, 비문화적이며, 반사회적인 것으로 그 원인은 인문학적 토대가 약하기 때문"이라며 "현재와 같은 시스템에서는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적인 삶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시인 출신의 도종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역시 "급속한 경제 발전이 물질적 풍요는 가져다 줬을지 몰라도 성찰과 사유는 턱없이 부족한 사회를 만들고 말았다"면서 "그런데도 정부와 대학은 인문 관련 학과들을 폐지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인문학이 위기라는 말은 전혀 과장된 얘기가 아니다"고 말했다.
 
자성의 목소리도 있다. 인문학이 현실의 변화에 발 맞추지 못할 경우 이 같은 소외현상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는 “아날로그 인문학으로 디지털 시대의 요청을 충족할 수 없다. 사회적 공공재로서의 인문학 재구성이 필요하다”면서 “기업이 인문계 소양을 갖춘 이공계 졸업생을 선호한다면, 인문학은 기초·교양은 물론 융합연구 등을 통해 시대 및 사회와 소통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사구시 인문학’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영택·김상우 기자 ykim98@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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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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