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큰 주목을 받았던 디지털 가상화폐 '비트코인'의 핵심 기술인 '블록체인'은 지금은 비트코인보다 더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비트코인의 거래·저장 시스템으로 출발한 블록체인은 다양한 분야로 뻗어나가고 있다. 일종의 저장·관리 시스템으로 데이터가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120개가 넘는 블록체인 관련 스타트업에 10억달러 이상이 투자됐으며 골드만삭스와 바클레이즈, 마이크로소프트, IBM 등 대형 금융회사와 IT 회사들도 이 기술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네덜란드의 ABN암로 은행은 "비트코인 그 자체보다는 근간을 이루는 블록체인 기술이 진정한 혁신"이라며 "과거 인터넷이 정보 및 커뮤니케이션을 완전히 바꿨듯이 블록체인은 가치와 신용에 대한 우리 생각을 바꿀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보의 '탈중심화'로 신뢰성·효율성 높여
'블록체인' 기술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분산장부관리시스템이다. 기존에는 중앙집중형으로 공인받은 제3자만 검증·기록·보관할 수 있었던 장부를 네트워크 참여자 모두에게 분산해 관리토록 한 기술이다. 각 참여자들은 모두 같은 내용의 장부를 갖게 되며 새로운 거래가 일어날 경우 모든 참여자의 장부를 똑같이 업데이트하고 비교해 신뢰성을 유지한다. 10분 동안 발생한 모든 거래정보가 기록된 '블록'을 만들어 모든 구성원에게 전송하고 이 블록이 유효하다고 확인되면 기존의 블록과 연결해 '체인'을 만드는 방식으로 구현돼 블록체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블록체인의 매력은 기존 관리시스템보다 신뢰성과 효율성이 크게 높다는 데 있다. 역설적이게도 정보를 분산하면서 신뢰성이 높아졌다. 정보를 조작하거나 해킹하려면 기존에는 정보가 집중된 중앙시스템에 접근하면 됐으나 이제는 분산된 다수의 정보에 손을 대야 하기 때문이다. 정보를 더 많이 나눠가질수록 신뢰성은 높아지게 된다.
거래정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블록체인의 특성도 보안성을 높인다. 김예구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최근 '블록체인 기술과 금융의 변화' 보고서를 통해 "블록체인은 가장 최근에 연결된 블록이 과거의 모든 거래 정보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라며 "이는 블록체인에 담긴 거래 기록의 위조 가능성을 낮추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설명했다. 특정 블록에 담긴 거래 기록을 조작하려면 그 블록 이후에 연결된 모든 블록을 수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조작을 새 블록이 생성되기 전까지 마쳐야 하는데 10분마다 블록이 하나씩 생기는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해킹이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시스템 자체가 신뢰성을 확보하고 있는 만큼 중간관리자의 역할은 필요 없게 되며 여기에 들어가던 수수료를 절감할 수 있다. 기존에는 안전한 돈거래를 위해 은행(중간관리자)을 이용했다면 블록체인을 통해서는 은행 없이도 믿을 수 있는 거래를 할 수 있게 된 것으로 은행에 내던 수수료를 아낄 수 있다. 스페인의 산탄데르은행은 금융권에서 블록체인을 활용할 경우 해외송금·증권거래·규제대응 등과 관련된 인프라 비용으로 오는 2022년까지 연간 150억~200억달러를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이 밖에도 거래 승인·기록이 다수의 참여에 의해 자동 실행되는 만큼 거래의 신속성이 극대화되며 공개된 소스로 블록체인을 쉽게 확장할 수 있어 IT 구축비용도 절감할 수 있다. 네트워크 참여자가 모든 거래기록에 공개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만큼 투명성도 높아져 거래 양성화 및 규제비용 절감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금융권 중심으로 도입논의 활발
블록체인 열기는 금융권을 중심으로 불붙는 모습이다. 골드만삭스와 바클레이즈, UBS 등 30곳이 넘는 글로벌 주요 은행들은 핀테크기업 R3와 손잡고 블록체인 표준 플랫폼을 공동 개발하고 있다. 미국 3대 증권거래소중 하나인 나스닥은 지난 10월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장외주식거래 플랫폼인 '나스닥 링크(Nasdaq Linq)'를 공개했다. 정식 운영은 내년 상반기부터 시작된다. 프레드릭 보스 나스닥 블록체인 담당 이사는 코인데스크와의 인터뷰에서 "블록체인 기술이 주는 효용성을 통해 장외거래 플랫폼인 링크의 사용량이 크게 확대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최근에는 미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온라인 가구판매업체 '오버스톡'이 블록체인을 통해 공모주를 발행하도록 허가하면서 블록체인으로 주식을 거래할 수 있는 시대가 눈앞에 펼쳐지게 됐다.
핀테크 스타트업들도 다양한 블록체인 기반 기술을 선보이고 있다. 체인(Chain)은 항공 마일리지와 같은 포인트를 블록체인을 통해 사용하는 방법을 개발중이다. 리플(Ripple)은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중개수수료 부담을 크게 줄인 해외송금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주요 고객으로는 독일의 피도르은행과 미국의 크로스리버은행 등이 있다.
IoT 접목하면 활용 분야 '무궁무진'
금융 이외의 분야에서도 블록체인 활용도는 무궁무진하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딜로이트는 최근 발간한 보고서 '비트코인을 넘어서'를 통해 "블록체인을 적용할 수 있는 분야는 수십가지가 있다"며 "모든 주요 산업에서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블록체인 활용이 기대되는 분야로는 '스마트계약(smart contract)'이 있다. 블록체인을 통해 일정 조건을 만족시키면 자동으로 거래가 실행되도록 프로그래밍 하는 것으로 소유권 이전이나 상속·증여 등에 사용될 수 있다. 독일의 스타트업 슬록(Slock)은 스마트계약을 부동산 임대에 적용했다. 블록체인을 통해 부동산 보증금과 임대료 지불이 확인되면 스마트폰을 이용해 건물에 부착된 스마트자물쇠를 열 수 있게 된다. 자물쇠를 열기 위해서는 단지 입금만 하면 되는 것이다. 계약내용이나 입금내역을 확인할 중간관리자는 필요 없다. 슬록은 단지 플랫폼만 제공할 뿐이다. 슬록은 공유경제가 확산되는 추세에서 이 같은 스마트계약 기술의 활용도가 높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블록체인 기반 임대 플랫폼인 '슬록'의 작동원리. 임대인과 임차인이 스마트계약을 통해 금전거래를 하면 자동으로 임대계약이 체결된다. 자료/슬록
스마트계약과 사물인터넷(IoT)의 결합은 일상의 다양한 분야에서 큰 파급력을 가지고 올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블록체인 기술이 사물인터넷의 보안성과 효율성을 높여줄 수 있는데다 스마트계약을 통해 기기 사이의 자율적인 의사소통 및 구동이 가능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IBM은 이미 올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가전전시회(CES)에서 삼성전자와 함께 연구 중인 블록체인 기반 사물인터넷 기술인 '어댑트(ADEPT)'를 공개했다. IBM의 설명에 따르면 어댑트 기술을 적용한 세탁기는 세제가 떨어졌을 경우 스스로 새로운 세제를 주문하고 결제할 수 있다. 세탁기의 주인은 스마트폰으로 주문내역을 확인하기만 하면 된다.
정부의 행정 시스템에 블록체인 기술이 사용될 수도 있다. 온두라스 정부는 부정부패와 탈세를 막기 위해 블록체인을 이용한 부동산등기시스템을 시범 구축했다. 아일랜드와 잉글랜드 사이의 작은 섬나라인 맨섬은 기업 등록 시스템에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하는 방안을 테스트중이다. 난민관리에도 블록체인이 쓰이고 있다. '비트네이션'은 블록체인을 이용해 난민들에게 임시 디지털신분증과 비트코인 기반 신용카드 등을 발급해지고 있다. 행정적인 공백상태에 놓인 난민을 위해 국제공증인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난민들은 이를 통해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생존 여부를 알리고 생활비를 받을 수도 있다.
블록체인을 '사랑의 징표'로 사용한 부부도 있었다. IT 전문매체 테크니컬브루클린에 따르면 킴 잭슨과 자크 르부는 지난달 2일 블록체인을 통해 결혼했다. 결혼을 일종의 계약관계로 인식하게 해 블록체인에 저장하도록 한 것이다. 남편인 르부는 "우리의 결합을 스마트계약 형태로 저장하고 상징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모든 네트워크 참여자가 확인할 수 있는 불변의 기록인 블록체인이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기에 꼭 맞는 곳이라고 본 것이다. 다만 아직까지 블록체인 결혼은 국가 행정시스템과 연동돼 있지는 않아 법적 구속력은 없다.
원수경 기자 sugyung@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