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경제민주화가 다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한때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 책사였던 김종인 전 의원을 비상대책위원장 겸 선거대책위원장 자리에 앉히면서 정치권의 관심이 촉발된 것이다. 김 위원장은 1987년 우리나라 헌법 개정에서 이른바 경제민주화 조항을 삽입한 장본인으로 유명하다.
현행 헌법 119조 1항에 “대한민국 경제 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2항은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 성장과 적정한 소득 분배, 시장지배와 경제력 남용 방지, 경제 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민주화를 위해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적시하고 있다. 자유시장경제 원칙을 기본적으로 존중하면서 부의 편중 같은 부작용을 막고자 국가의 개입 여지를 남겨 놓고 있는 것이다.
자유시장경제 체제에서 발생하는 과도한 빈부격차를 보다 평등하게 조정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논리다. 문제는 이 조항을 어떻게 적용하느냐다. 2항을 우선해 자유시장경제 질서에 반하는 규제도 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질서 범위 내에서 제한적으로 적용하느냐의 문제다. 여기에서 보수와 진보, 재계와 정치권의 상반된 주장이 나오고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누가 옳고 그르냐의 문제가 아닌 시대에 따라 국민적 합의가 무엇이냐가 더 중요할 것이다. 과연 우리나라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경제민주화 조항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고,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 법무법인 대오 고문 조대환 변호사로부터 들어본다.[편집자 주]
경제와 민주화란 말은 그 개념이 비교적 명확하다. 경제란 ‘인간의 공동생활을 위한 물적 기초가 되는 재화와 용역을 생산, 분배, 소비하는 활동과 그것을 통해 형성되는 사회관계의 총체’를 말하고, 민주화란 ‘정치, 경제, 문화를 포함한 사회 전 영역에서 자유와 평등을 포괄한 민주주의 원리들이 확산되고 심화되는 과정’을 뜻한다.
그렇다면 경제와 민주화를 결합한 ‘경제민주화’란 용어는 ‘경제활동 관계에 있어 불식되지 못한 비민주주의적 요소를 제거해 민주주의 원리들이 좀 더 확산되고 심화되도록 하는 움직임’이라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시대별로 경제체제가 상이하니 시대별로 요구되는 경제민주화의 목표와 해법도 다를 수밖에 없다. 또 각 나라별로 경제활동과 관계의 비민주적 요소가 존재하는 영역과 양상이 서로 다를 것이니 경제민주화란 개념은 고정불변의 개념이 아닌 상황에 따라 유동적인, 그리고 시대에 따라 그 함의가 달라지는 형성적, 유동적 개념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경제민주화 논의가 제기된 것은 1948년 제헌헌법이다. 제헌헌법은 당시 세계정신을 지배하던 복지민주주의 정신을 받아들여 정치적으로 봉건시대 및 일제시대의 독재체제에서 민주공화정으로 이행하는 것이었고, 경제적으로는 사유재산권과 자유영업을 원칙으로 하되 기업과 농지의 독점으로 소수계층에 경제력이 집중되는 것을 금지하고 기층 민중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제정됐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정부에 공공복리의 향상을 위해 보호·조정하는 의무를 부여하고(제5조), 영리목적 사기업에 근로자의 ‘이익분배균점권’을 보장하고(제18조 제2항),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제86조), 운수, 통신, 금융 등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유로 하며(제87조 제1항), 모든 국민은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해야 하고 타인의 경제상 자유는 그 한계 내에서만 보장된다는 것이다.(제84조)
그러나 제1, 2공화국 헌법의 경제민주화 원칙은 1950년 6·25 전쟁 발발로 거의 모든 산업자원이 파괴되고 해외원조에 의존하는 경제환경 속에서는 허울 좋은 구호에 불과했다. 또 약 10년간의 정치적 혼란은 경제적 피폐를 더욱 강화시켰다. 그러한 궁핍의 지속은 민주적 절차보다 민생고를 우선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이고 그 목적을 위해선 다소간의 권위주의적 독재가 필요하다는 인식도 팽배해졌다.
1962년 제정된 제3공화국 헌법은 먼저 원시적 경제축적을 형성해 경제성장을 이룩하며, 성장을 통한 고용과 재분배 등 일종의 낙수효과를 통해 전 국민에게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전제 하에 구상됐다.
제3공화국 헌법과 제헌헌법을 비교하면, 정부의 경제권능의 우선순위를 ‘정부의 공공복리를 위한 보호, 조정의무’에서 ‘개인의 경제상 자유와 창의 존중’으로 변경해(제111조 제1항) 자유경쟁주의 원칙을 천명했다.(제5조)
근로자의 이익분배균점권을 폐지하되, 근로의 권리(제28조 제1항)와 사회보장(제30조 제2항, 제3항)을 강조했다. ‘농지분배’를 ‘소작금지’(제113조)로 후퇴시키고, ‘공공성을 가진 기업의 국유화’도 폐지했다. 마지막으로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시키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게 했다.(제111조 제2항)
제3공화국 헌법의 자유주의 경제관과 국가주도 경제정책 운영은 강력한 정부의 권위에 근거해 일부 산업이나 기업에 대한 특혜성 지원과 독점 인정 등을 당연시했다. 결과적으로 자원의 자의적, 선택적 배분과 특정분야나 기업에 대한 집중적 지원이 이뤄져 빠른 속도의 외형적 경제성장을 가져왔다.
다만 결과적으로 경제성장에 발맞춰 경제활동 및 분배관계에 있어 비민주적 요소를 찾아내 지속적으로 민주화하는 경제민주화 과정을 생략한 채 제5공화국 종료시까지 약 25년간이나 방치하게 됐다. 그 바람에 평등권 등 기본적 인권이나 근로자의 노동권 등이 무시되고 특히 재벌 기업의 순환출자를 통한 일감 독점, 하청업체 착취, 오너기업인의 회사 사유화 및 자금 유용, 대기업노동조합의 횡포 등을 허용하는 관행이 뿌리내리게 됐다.
반면 중소기업의 경영상황과 서민층의 생활은 상대적으로 궁핍화됐고 급기야 양극화의 심화와 불평등의 고착화라는 경제비민주화의 비극을 필연적으로 배태하게 돼 이를 시정하려는 저항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방면의 비민주적 억압은 결국 1987년 6월 시민들의 폭발적 민주화 시위로 이어졌다. 6·29 선언을 통해 정치분야에서의 대통령직선제 수용과 경제민주화 요구가 표출한 것은 당연한 일이며 ‘경제민주화’란 용어를 헌법 조항에 최초로 직접 언급한 것이 바로 현행 헌법 제119조 제2항이다.
또 현행 헌법은 경제민주화를 위해 근로의 권리 및 최저임금제 시행(제32조 제1항), 농어민 보호육성(제123조 제1항, 제4항), 지역간 균형발전(제123조 제2항), 중소기업보호육성(제123조 제3항),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제34조) 등을 새롭개 규정했다.
당시의 경제민주화 요구는 권위주의 정부에 의한 압축성장 과정에서 노정된 부문별, 계층별, 지역 간 불균형을 시정하고, 경제운용에서의 정부의 과도한 간섭을 배제하고,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과 독점횡포에 대한 견제, 기업의 의사결정 및 분배 과정에서의 경제주체들간의 균형 등이 주로 논의됐다.
그렇지만 당시 경제적 호황과 복지제도의 일부 개선에 도취된 시민들이 정치분야의 민주화에만 관심이 편향되면서 오히려 재벌과 대기업의 시장지배가 더욱 확대되고 취약계층의 복지혜택을 통한 양극화 방지를 위한 인간존엄권 및 평등권 보장 분야는 외면되는 기현상을 낳고 말았다.
즉 우리나라는 제헌헌법 이래 ‘경제민주화’에 대한 논의가 있어왔지만 현실은 경제비민주화의 심화가 지속돼 왔다. 이를 개선하려는 각종 입법은 존재했지만 정치인들은 물론 시민들조차 심각한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다 보니 경제민주화에 별 진척이 없었던 것이다.
지구촌경제는 20세기 후반까지 폭발적인 성장을 이뤘고 그 이면에는 대기업의 과잉생산과 근로자의 과잉소비의 교환이 숨겨져 있었다. 그러나 해외소비시장의 포화로 과잉생산이 소비처를 잃으면서 국내 일자리가 줄어들고 실업자가 늘어나기 시작해 유효수요의 만성적 취약상태가 초래됐다.
그런 궁핍화성장은 실업과 임금삭감을 낳고 불평등 심화, 괜찮은 일자리 부족, 사회적 불만 증가, 시민참여 부족, 정치적 냉담 등을 가져와 자유와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적 가치와는 멀어지게 됐다.
그 차원에서 1998년 IMF 외환위기와 2008년 국제금융위기는 과잉생산, 과잉금융을 따르지 못하는 소비자의 유효수요 부족이 초래한 필연적 결과다. 소비를 책임지는 계층, 즉 근로자 계층의 임금이 삭감되거나 실업에 이르거나 혹은 국가의 복지재정이 충분치 못하다면 국가경제 전체, 나아가 세계경제 전반에 혼란이 초래된다는 것은 분명해졌다.
결국 주요 생산자인 대기업 스스로 고용을 늘리고 노동집약적 성격을 가진 중소기업에 일감을 나누어주며, 세금을 많이 내 복지재정을 튼튼히 하는 방법으로 소비자의 양적 증가와 질적 양질화에 노력해야만 대기업 생산품의 소비도 가능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다.
그럼에도 현재까지 대형 기업의 도산이나 세계적 경제위기 등 특정 사건이 발생할 때만 일시적으로 경제민주화를 외치다 일순간에 논의가 사라지곤 한다. 정확한 문제의식과 지속적인 실현노력을 집중하지 못하는 우리의 정치의식과 시민정신으로는 현행 헌법상의 경제민주화를 이루어 내기 어렵다.
지난 2012년 대선에서도 유력 후보들이 경쟁적으로 경제민주화 구호와 다양한 접근방법을 제시했지만, 대선 종료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도 일부 정치인과 학자들을 중심으로 경제민주화 불씨를 살리려고 노력하지만 메아리 없는 외침에 불과하다.
‘성장은 필연적으로 방대한 빈곤하고 배제되는 주변부를 창출하게 된다.’(유엔 1969인권보고서) 지속가능한 통합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중심부가 주변부의 구제와 참여를 이끌어 내야하며 이러한 지속적 노력이 바로 경제민주화인 것이다.
국가미래연구원
지난 2012년 11월16일,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신규 순환출자 금지, 금산분리 강화 등을 골자로 하는 경제민주화 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