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문명에 대한 비판? 멜 깁슨의 <아포칼립토>

책잡힌사람

입력 : 2016-02-03 오후 6:43:40
* 스포가 있습니다.
 
Ⅰ. 할리우드 영화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할리우드 영화는 쉽고, 자극적이고, 재미있다는 점에서 세계인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막강한 자본력과 상품수출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지원도 할리우드 영화가 세계로 퍼지는 데에 한몫했다. 한국에도 매년 개봉하는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자 많은 사람이 영화관을 찾는다.
 
그런데 영화 한 편 한 편에는 제작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의 생각이 담기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런 ‘생각’에 대해 얼마나 의식하면서 영화를 관람하는 걸까? 할리우드 대중문화가 인기를 끎과 동시에 이데올로기가 함께 퍼진다는 이야기는 뭇사람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곤 했다. 할리우드 영화가 오리엔탈리즘?아메리칸드림?미국 민주주의 및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을 사람들에게 내면화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곤 한다. 
 
2006년에 개봉한 『아포칼립토』는 배우로도 유명한 멜 깁슨(Mel Gibson)의 작품이다. 그는 1996년, 직접 감독한 『브레이브 하트(Braveheat)』로 아카데미상을 휩쓸며 배우로서뿐만 아니라 영화 제작자로서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은 바 있다. 2004년,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12시간을 보여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란 작품도 종교계의 큰 반향을 일으키며 흥행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필요 이상으로 폭력적·선정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반유대적 정서를 드러낸다는 점과 관련해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멜 깁슨이 극 보수주의 성향의 공화당 지지자이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에 논쟁은 더 뜨거웠다. 2년 뒤에도 논란의 중심에 선 한 영화를 제작하는데 그것이 바로 『아포칼립토』다. 서구 제국주의를 미화하고 서구인의 시선으로 마야문명을 재단한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아포칼립토 영화 포스터. 사진/바람아시아
 
영화 포스터
 
영화는 오프닝 대신 저명한 사학자 윌 듀런트의 “거대한 문명은 외세에 정복당하기 전에 내부로부터 붕괴했다.”란 인용구와 함께 시작 한다. 거대한 문명은 바로 마야문명이다. 『아포칼립토』는 마야문명이 쇠락해 가던 시절 제국을 운영하는 ‘홀케인 부족’과 평화롭게 사냥하며 공동체를 형성해 살던 ‘소수 부족’을 다룬 영화다. 
 
16세기 유카탄 반도의 어느 밀림에서 소수 부족의 ‘표범 발’은 부족장인 아버지 ‘부싯돌 하늘’,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사냥을 나갔다가 우거진 수풀 사이에서 인기척을 느낀다. 타 부족의 침략을 받고 ‘새로 시작할 곳을 찾아’(제목 ‘아포칼립토’가 그리스어로 ‘새로운 시작’을 뜻한다) 이동하는 무리였다. ‘표범 발’은 그들의 눈망울에 서린 두려움을 보았는데 갑작스럽게도 그 두려움이 그네들에게도 현실이 되어 눈앞에 다가온다. 
 
소수 부족 마을 사람들은 화목한 밤을 보내고 잠들어있는 상황이었다. 적막함이 감도는 마을에 개 짖는 소리가 들리다가는 갑자기 깨갱 소리를 마지막으로 조용해진다. 곧이어 홀케인 부족의 전사들이 마을에 침입하여 소수 부족민을 학살하고 나머지는 포로로 사로잡는다. ‘표범 발’은 다행히 아내와 어린 아들을 빗물 저장고에 숨겼으나 아버지의 죽음을 막지 못하고 끌려간다. 제국에 끌려간 여자 포로들은 노예로 팔리고 남자 포로는 인신 공양의 제물로 바쳐질 위기에 처한다. 역병과 기근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달라는 제사에 바쳐질 인간 제물이었다. 
 
거대한 탑 위에서 제사장의 칼이 포로의 가슴을 꿰뚫고 심장을 뜯어간다. 그리고는 포로의 목이 잘려나간다. 두 포로가 그렇게 홀케인 부족의 제물이 되고 ‘표범 발’의 차례가 다가온다. 칼이 그의 심장을 향하는 순간 갑작스레 개기일식이 일어난다. 그 덕에 그는 나머지 포로들과 함께 풀려난다. 풀려난 포로들은 홀케인 전사들의 놀잇감이 되어 하나둘 죽어 나가는데 그 과정에서 ‘표범 발’은 ‘큰 늑대’의 아들 ‘쪼개진 바위’를 죽이고는 달아난다. 홀케인 전사들과 ‘표범 발’ 간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표범 발’은 그들에게서 벗어나 아내와 아들을 구출할 수 있을까. 
 
Ⅱ. 『아포칼립토』는 액션·모험 영화다. 마야문명 안에서 강한 부족이 소수 부족을 침략하여 노예로 삼자, 주인공이 그로부터 도망치며 벌이는 추격신이 내용 대부분을 차지한다. 겉으로 보면 강한 부족(악) vs 약한 부족(선)의 구도 속에서 주인공인 ‘표범 발’이 악을 물리치고 탈출한다는 플롯이다. 그런데 멜 깁슨이 마야문명을 그리는 모습이 조금은 불편하게 느껴진다. 영화는 마야문명의 쇠퇴기를 다루며 홀케인 부족의 상황이 문명의 쇠퇴기를 대변한다. 홀케인 제국은 거대하지만 각종 질병과 기근을 겪는 곳으로 등장한다. 제국의 노예들은 처참하게 살아가고 거리엔 기근과 질병으로 시체가 즐비하다. 질병과 기근이 가져다준 두려움은 종교와 같은 초월적 힘을 향한 맹신·맹종으로 이어진다. 
 
백성들은 제국의 권력층이 행하는 인신 공양에 열광한다. 그들의 두려움은 타 부족의 생명을 계속 집어삼켰다. 제사장은 이렇게 외친다. “태양의 위대한 백성들이여. 우리는 강하다. 우리는 숙명의 백성들이다.”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은 신에게 다가가는 통로요 그들에게 닥친 전염병?기근 등의 재앙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다. 계속해서 제국은 잔인하고 야만스러운 곳으로 묘사된다. 제국사람에게 희생된 포로들은 거대한 시쳇더미를 이루었다. 영화가 보여주는 마야문명은 영화가 시작할 때 등장한 글귀를 상기시킨다. “거대한 문명은 외세에 정복당하기 전에 내부로부터 붕괴했다.” 
 
사진/바람아시아
 
인신공양에 열광하는 사람들
 
실제 역사에서 마야문명은 스페인에 의해 멸망했다. 하지만 영화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마야문명은 스페인에 의해 정복당하기 전에 내부로부터 붕괴했다.’ 이런 논리는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성을 정당화하는 듯 보인다. 스페인의 ‘코르도바’ 함선이 마야인과 접촉을 시도했던 1515년, 그리고 가톨릭 신부 ‘란다’가 주교로 파견된 1549년에 마야문명은 실제로 몰락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혹자는 이 영화를 서구 제국주의나 서구인의 시선을 운운하며 비판하는 걸 못마땅해 하기도 한다. 
 
영화는 “문명의 몰락원인을 추측하여 만”들었으며 “거대했던 문명이 영화 속의 질병이나 가뭄에 대한 두려움으로, 신에 대한 맹목적인 맹신으로 이성이 가려진채 산 재물을 바치고, 중우들이 환호하는 집단주의적 상황으로 변질되어 마침내 붕괴되는 상황을” 묘사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인종차별주의?제국주의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거대 문명이 마주할 수 있는 문제점들에 대한 경각심이다. 현대문명 몰락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게 그리스어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아포칼립토』란 제목이 가진 뜻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논리는 영화에 드러난 시선을 그대로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게 아닐까. 『아포칼립토』에 나타난 불편한 시선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마야문명은 야만적이고 잔인한 곳으로 묘사된다. 마야문명은 어떻게 거대문명이 내부로부터 붕괴한다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대상이다. 영화는 이와 같은 사실에 몇 가지 교묘한 장치를 더한다. 멜 깁슨은 영화의 사실성을 추구하고자 대화를 전부 마야어로 처리했다. 멕시코시티의 배우 캐스팅 회사를 통해 배우 오디션을 진행했고 얼굴이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을 고용했다. 그런데 감독이 추구한 사실성은 마야문명이 실제로도 영화에 묘사된 것과 같이 야만적이고 잔혹했던 것처럼 생각하게 할 수 있다. 
 
영화의 마야문명은 철저히 외부인의 시선에서 재구성된 현실이다. 영화는 홀케인 제국의 폭력성과 잔혹성에만 초점을 맞춘다. 제사장의 말에 현혹되어 인신 공양을 열렬히 환영하는 백성의 모습은 야만스럽다. 인신 공양 후 풀려난 포로들을 사냥하는 행위는 가학적이다. 주인공 ‘표범 발’이 도망치면서 바라본 수많은 시쳇더미는 외부의 불편한 시선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부분이다. 
 
사실 영화에 나타난 인신 공양은 아즈텍 문명에서 ‘주로’ 행해진 관습이었다. 그런데 마치 마야문명이 그랬던 것처럼 묘사된다. 반면, 마야문명의 문자 체계? 역법?산술 등 뛰어났던 부분들은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에 등장한 모습이 일부 사실이라면 마야인은 왜 그러했던 것인지, 또한 마야문명은 실제로 어떠했는지 등 영화는 다양한 의문을 잠재운다. ‘판단’에 앞서 마야문명을 ‘이해’하려는 여유는 영화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이런 이야기가 단순한 문화상대주의나 또 다른 자문화중심주의로 이어지는 것은 주의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사진/바람아시아
 
즐비한 시체들
 
영화의 주인공이 마야의 소수 부족 사람이라는 점은 두 번째 교묘한 장치다. 영화가 끝나갈 즈음 해변까지 도망간 주인공은 끝까지 쫓아온 홀케인 전사 두 명에게 붙잡힐 위기에 처한다. 여기에서 영화의 양자구도(소수 부족 vs 홀케인 부족)가 깨진다. 배를 타고 건너오는 서양인들과 마주하기 때문이다. 서구인이 보는 마야인, 마야인이 보는 서구인이 아니라, ‘선한 마야인’이 보는 ‘악한 마야인과 서구인’이란 구도가 생겨난다. ‘표범 발’이 홀케인 족 전사에게 붙잡히기 직전, 십자가를 들고 해변으로 다가오는 서양인의 모습은 기묘하게 느껴진다. 이 이질적인 마주침은 무얼 상징하는 걸까. 실제의 역사에서 서양인의 등장은 마야문명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마야 문명 내부의 분열을 상징하는 대치상태(‘표범 발’ vs ‘홀케인 족 전사’)에서 서구인이 등장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번째 장치’와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글귀’는 서구문명이 실제로 저지른 잘못의 정도를 희석할 수 있다. 후자의 논리는 서구 제국주의를 정당화한다고 앞서 언급했다. 지금부턴 ‘두 번째 장치’가 서구 제국주의를 어떤 식으로 정당화하는지 살펴보자. 
 
마야 문명의 몰락을 상징하는 홀케인 부족은 타 부족을 ‘침략’하여 ‘폭력’을 저지른다. 그런데 실제의 역사에서 서구인들도 마야문명을 ‘침략’하여 ‘폭력’을 저질렀다. 영화의 주인공이 마야의 소수 부족 사람이라는 점을 떠올려보자. 주인공 표범 발이 홀케인 전사에 의해 붙잡히려던 찰나 서구인이 등장한다. 
 
표범 발의 시선에서 보았을 때 홀케인 전사와(현재 ‘침략’과 ‘폭력’을 드러내는 주체) 서구인은(잠재적으로 ‘침략’과 ‘폭력’을 드러낼 주체)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둘은 ‘침략성’과 ‘폭력성’을 가졌다는 점에서 같기 때문이다. 즉, 영화의 삼자구도 속에서 홀케인 부족(마야문명)과 서구인(서구문명)의 경계는 흐려진다. 여기에서 ‘침략성’과 ‘폭력성’은 어느 특정 문명의 전유물이 아닌 보편적 현상으로 치환된다. 서구인이 마야문명을 침략하고 폭력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지만, 쇠퇴하던 마야문명 내부에서도 타 부족을 침략하고 폭력을 저지른 행위가 있었다는 점에서 피차일반(彼此一般)이다. 
 
따라서 이 영화를 마야 문명이 아닌 보편적 문명, 나아가 현대 문명과 관련하여 해석하려는 시도가 나타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문명엔 흥망성쇠가 있기 마련이고 그 원인이 내부에도 있다는 점은 보편적이다. 영화에서 “새로 시작할 곳을 찾아서”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쇠락하는 문명에 대한 경각심으로 해석되기에 이른다. 
 
문명은 망하고 쇠퇴한다는 보편적 현상을 강조할 순 있다. 하지만 그런 논리가 영화에서 함축하게 되는 다른 논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게 아닐까. 영화가 현대의 이기적 문명에 대한 반성으로 해석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래도 특정 인종?문명에 대한 차별적 관점으로 해석될 수 있다면 그 점은 유의해야 한다. 후자의 해석이 무의식적으로 무비판적으로 내면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야문명의 폭력적 행위가 문명을 내부로부터 붕괴시켰고 그 폭력성이 서구문명의 폭력성과 같은 것이라면, 여기에서 서구문명의 ‘침략성’과 ‘폭력성’은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게 된다. 마야문명이나 서구문명이나 ‘이기적인’ 자기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똑같다. ‘문명’이라는 유개념(類槪念)의 문제 앞에서 서구문명이란 종개념(種槪念)이 가진 문제점은 희석된다. 이는 실제 역사에서 마야문명을 멸망시킨 서구인의 침입을 간과하게 한다. 
 
문명은 흥망성쇠를 겪고 내부로부터 붕괴될 수도 있다. 하지만 붕괴된 후 그 자리에 새로운 문명이 자생(自生)하는 것과 몰락해가는 문명을 멸망시키고 식민지로 삼는 것은 결이 다르다. 제국주의 국가가 타 문명의 폭력성·후진성·야만성 등을 자신의 식민지배 정당화 논리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타 국가를 점령한 뒤 어차피 쇠퇴해가는 곳이었다며 ‘근대’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 사례는 매우 많았다. 따라서 문명의 보편적 현상을 말하기 전에 문명 간에 발생했던 개별적 현상을 중요하게 논할 필요가 있다. 또한, 마야문명을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라고 규정한 뒤, 그런 요소들이 문명을 멸망으로 이끌었다는 이야기에 의문을 제기해볼 필요도 있다고 본다. 
 
이 영화를 보지 말자는 건 아니다. 『아포칼립토』는 멜깁슨이 추구하는 사실성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액션이 더해져 만들어진 대작임이 분명하다. 대단한 액션?모험 영화로는 손색이 없다. 영화의 흥미진진함을 누리되, 보편문명에 대한 경각심으로 받아들이되, 그 전에 이 영화에 내재한 불편한 시선을 ‘의식’하면 될 뿐이다.
 
 
송윤아 / 바람저널리스트 baram.asia T 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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