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⑦"하늘의 은하수를 모르시나요?"

70년대 사람들(2)-동일방직 똥물사건

입력 : 2016-02-22 오전 6:00:00
얼마 전 TV의 한 육아프로그램에서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아기들이 거실에서 뛰어노는 장면에 흘러나온 배경음악을 듣고 놀란 적이 있다. 단 몇 초 동안이었고, 경쾌한 멜로디가 발랄한 아이들의 움직임에 어울린다고 판단해 선곡한 듯 보였지만,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라는 가사가 아기들과 함께 나오니 아이러니한 느낌이 든 것도 사실이다. 1989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 의해 발표된 이 노래 '사계'는 2001년 힙합그룹 '거북이'의 리메이크로 대중의 인기를 얻게 되는데, '민중가요'에서 '대중가요'로 확산되어 간 이 노래의 역사성만큼이나 그 가사의 역사적 배경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사건의 배경
 
노찾사의 '사계'가 산업화시기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사계절의 변화에 상관없이 미싱 일에 매달려야 했던 여성노동자들의 애환을 그린 노래라면, 그러한 애환이 최소한의 인권확보를 위한 투쟁으로 발현된 대표적인 사건이 1970년대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의 '알몸 농성'과 '똥물 투척 사건'이다. "땅 위의 동일방직 똥물사건을 모르시나요? / 하늘의 은하수를 모르시나요? // 동일방직 공장 처녀들을 / 공순이라 부르는 시절 / 공장 사내들을 / 공돌이라 부르는 시절 // 그 동일방직 공순이들한테 똥물 퍼부어 / 밀어붙인 사건 / 똥물 뒤집어쓴 채 / 닭장차에 실려간 사건"('이총각', 13권).
 
1978년 9월1일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의 호소. ⓒ고은재단
 
이 시의 사건을 이해하려면 당시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70년대 대표적인 섬유회사이던 인천의 동일방직은 1972년 당시 조합원 1383명 중 1204명이 여성이었지만, 노동조합은 늘 남성들이 장악한 어용노조였다. 그런데 1972년 5월10일 대의원대회에서 한국 노조 역사상 최초로 여성지부장(주길자)이 탄생하게 된다. 이 여성집행부는 민주적인 노조운영과 더불어 남녀임금차별 철폐, 월차와 생리휴가 쟁취, 식사시간 확보, 기숙사에 온수 설치 등 조합원들의 권익을 위한 활동을 해나가는데, 그 덕분에 1975년에도 다시 여성지부장(이영숙)이 선출된다. 민주노조의 출현이 반갑지 않았던 정부와 회사 측은 남성노동자들을 이용해 노조집행부를 교체하려 한다. 1976년 7월23일 이영숙 지부장이 경찰에 연행되는데, 회사의 비호를 받는 남성노동자들이 그들만의 대의원대회를 열어 이영숙 집행부에 대한 불신임안을 가결시키고 지부장을 교체한다. 이 때 회사 측이 여성조합원들을 격리하기 위해 기숙사 문에 못질을 해 가두는 바람에 조합원들은 창문에서 뛰어내려 농성에 돌입하게 된다.
 
농성 3일째인 7월25일 경찰이 강제해산을 강행하자 여성노동자들이 반나체시위를 시도하게 되는데, 이는 아무리 경찰이라도 설마 옷을 벗은 여자에게 손을 대랴, 하는 생각에서였으나 이들의 순박한 믿음은 '동방예의지국'과는 거리가 먼 '야만'에 의해 처절히 부서지고 만다. "더 가파로운 해 앞서 가파로운 해 1976년 / … // 그 인천 앞바다 개펄에서 올라와 / 동구 만석동 개펄 / 동일방직 인천공장 개펄 / 거기 4백여 여공 / 그 가운데 70여명 / 더이상의 대책 없이 // 알몸 농성으로 맞섰다 / 경찰과 사용자 쪽 깡패들 울짱치고 있는데 / 어쩌자고! / 어쩌자고!"('알몸 농성', 15권).
 
고은 시인의 시 '알몸 농성' 초안. ⓒ고은재단
 
수많은 남자들, 경찰과 깡패들 앞에서 옷을 벗어던져서라도 강제연행에 저항하고 "근로 인권 유린 중지하라"고 외쳐야 했던 스무 살 안팎의 처녀들이 속옷차림으로, 욕설과 곤봉과 주먹세례를 받으며 저들의 손에 의해 끌려갈 때 그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사실 수치심은 경찰과 깡패들의 몫이어야 했으나, 어린 처녀들에게 이 끔찍한 아수라장의 순간은 충격으로 남아 이들 중 두 명은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된다. "경찰은 어용노조 편에 서 / 72명 알몸 여공 / 마구잡이로 낚아채 실어갔다 / 사진 찍어대며 / 주물러대며 // 알몸이면 남성이 접근하지 못하리라는 / 오랜 남녀유별의 풍속 믿은 나머지 / 그렇게 처절히 발가벗었는데 / 그 알몸째 / 닭장차에 실려버렸다 // 그 아비규환 / 임순옥 양 / 이동희 양 / 정신착란 일으켜 / 병원으로 보내져 / 아이 무서워! / 저 구석에 / 누가 있다! 누가 있다! // 심지어는 / 시골에서 달려온 어머니한테 / 당신은 누구냐 / 당신 깡패지? 어용노조지?"('알몸 농성', 15권).
 
"가난하게 살아 왔지만 똥을 먹고 살 수는 없다"
 
1976년 12월26일 이영숙 지부장이 개인 사정으로 퇴사한 후, 중앙정보부와 회사, 섬유노조 본부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1977년 3월30일 선거에서 집행부 총무부장이던 이총각이 반대파를 누르고 승리한다. "그 인천 도시산업선교회 노조 공순이들을 / 이끌던 사람 / 이총각 / 총각이 아닌 노처녀 / 눈빛 치 떨리고 / 키 성큼 커서 / 감옥 드나들 때 한마디 말도 치 떨렸"던 이총각, "비밀집회 불빛에 빛나는 눈 / 거기서 입 다물고 나오지만 / 다음날 거리는 / 그의 소리로 꽉"찼던('이총각', 13권) 이총각 지부장은, 1978년 2월 21일 노조 대의원선거를 대비해 경찰에 경비를 요청한다. 그러나 바로 이 날, 경찰의 방관 하에, 회사 측과 한국노총 섬유노조의 사주를 받은 집행부 반대파 남성노동자들이 투표가 진행될 예정이던 오전 6시 이전 양동이에 분뇨를 담아와 여성조합원들에게 똥물을 끼얹고 심지어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똥을 입 안에, 그리고 옷 속 가슴에까지 쑤셔 넣는 만행을 자행한다. "어용노조 사내들이 끼얹은 / 똥물 바가지 뒤집어쓴 채 / 주저앉아 / 엉엉 / 그저 엉엉 울기만 했다 // … // 어머니! / 어머니! 하고 땅 치며 / 똥물 말라가며 / 주근깨 얼굴 눈물 말라가며"('동일방직 노동자 김옥순', 15권). 이 날이 바로 38년 전 어제이다.
 
1978년 2월21일 똥물을 뒤집어 쓴 여성노동자들. ⓒ고은재단
 
이로부터 23년이 지난 2001년 3월19일, 박정희정권에 의해 1973년 고문·살해당한 고(故) 최종길 교수의 동생이자 전직 중앙정보부 노사문제 인천조정관이었던 최종선의 증언으로, '동일방직 똥물투척사건'에 중정 2국 경제과가 개입했음이 밝혀진다. 즉, 이 경악할 사건은 민주노조 파괴를 위해 중앙정보부 본부, 조직행동대를 파견한 전국섬유노조 본조, 동일방직 회사, 그리고 노조집행부 반대파 남성조합원들이 공조한 야만행위였던 것이다.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은, 이후 3월10일 '근로자의 날' 기념식 기습시위와 명동성당 단식농성 등 투쟁을 계속하지만, 결국 124명이 해고당하고 이들의 명단은 중정의 관리 하에 '블랙리스트'가 되어 전국섬유산업노조위원장 김영태의 손으로 전국의 사업장에 배포된다. 노조는 회사 쪽으로 돌아서서 똥물 투척에 가담했던 여성노동자를 내세워 집행부를 새로 구성했고, 124명의 해고노동자들은 길고도 지난한 복직투쟁을 시작하게 된다.
 
도시산업선교회의 사람들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이 민주노조를 만들기 위해 용감하게 일어설 수 있었던 데는, 앞서 시에서도 잠깐 나왔듯이, 도시산업선교회의 힘이 컸다. "인천산업선교회 / 이 방 / 저 방 퀴퀴한 담요 냄새 // 동일방직 노동자들과 함께 살고 있었"던 여성목사, "싸울 때는 그 새된 목소리 / 햇볕 쨍쨍 / 쨍그랑 유리 깨어지는데 // 그러나 깊은 밤 그녀의 기도는 어머니였"고 "진한 누님이었"던 조화순 목사가 그 한 인물이다('조화순', 12권). <만인보>는 산업선교회의 시작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기독교 감리교회는 / 1961년 윤창덕과 조용구 목사를 / 동일방직 / 한국기계공업 공장으로 보냈다 / 그것이 한국 도시산업선교의 시작이었다 // 1957년 4월 산업전도가 출발했다 / 생산재 생산공장 / 전쟁 이후 하나둘 생겨날 때 / 거기에 산업선교의 의식이 출발했다"('오글', 15권).
 
'동일방직 똥물사건' 현장의 모습. ⓒ고은재단
 
1970년대 도시산업선교회는 노동자들의 사회인식과 인권투쟁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한국현대사에 있어 산업선교회의 역할은 그 자체가 하나의 큰 주제이므로 다음에 독립적으로 다시 다루겠지만, "어두컴컴"한 방에서 동일방직 노동자들과 동고동락한 조화순 목사의 다음 일화는, 고은시인 특유의 익살스러운 묘사로 인해 당시 사회운동가들의 분위기―암울한 시대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를 느낄 수 있게 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소녀 이래 그대로였다 / 1934년생 개띠라 / 동갑내기 개띠클럽 / 박현채 / 한승헌 / 김중배 / 조화순 들 걸어가다가 // 뒤처진 조화순 소리지르기를 / 이 개새끼들아 / 그래 민주화도 못해 / 통일도 못해 / 이 개새끼들아"('조화순', 12권).
 
작년에 서울역사박물관이 구로공단 50년의 역사를 돌아보기 위해 기획한 '가리봉오거리 전(展)'(2015년 4월24일~7월12일)은 그 공간이 '디지털단지'로서만 익숙한 세대에게 '벌집촌 여공'들의 삶과 우리의 한 역사를 보여주는 좋은 계기였다. 모쪼록, '사계' 노래를 즐거이 듣다가 그 가사의 내용이 의아한 젊은 독자가 있다면, 그 시절 역사를 찾아보길 권하고 싶다.
 
박성현 고은재단 아카이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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