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원수경 기자] 최근 등장한 신조어 중에 '성덕'이라는 말이 있다. '성공한 덕후'의 줄임말로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통해서 성공한 사람 혹은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좋아하는 대상을 직접 만나게 된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서정남 CJ오쇼핑 e트렌드상품개발팀 MD는 홈쇼핑계의 '성덕'이다. CJ오쇼핑의 4년차 MD로 피규어, 드론, 고급레저용품 등 마니아 상품 소싱을 전문으로 하고 있다. 야심한 새벽 홈쇼핑에서 야구장 응원가가 울려퍼지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서 MD는 최근 덕후력(?)을 인정받아 본격 덕후 겨냥 방송 '오덕후의 밤'의 시즌2에 합류했다. 지난달 23일 첫 아이템으로 야구단 'SK와이번스' 시즌권을 판매했다. 치어리더들과 야구공 탈을 쓴 쇼호스트 등이 등장하며 그간 홈쇼핑에서는 쉽게 볼 수 없던 진풍경을 만들어냈다. 이런 기상천외한 방송에 덕후들은 응답했다. 당시 SNS에 올라온 인증샷에는 "내 생에 첫 홈쇼핑 구매", "오늘 방송은 알람까지 해놓고 자다 일어나서 보는 중"이라는 생방송 인증 멘트가 잇달았다. 서 MD는 다음 달에는 온라인몰을 통해 자전거와 타이어 등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라이드샵'을 열고 다시 덕후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예정이다. "CJ오쇼핑을 '덕후의 성지'로 만들겠다"는 서정남 MD를 직접 만나 덕후들을 매료시킨 비법을 들어봤다.
서정남 CJ오쇼핑 e트렌드상품개발팀 MD. 사진/CJ오쇼핑
서정남 MD가 덕후들의 지갑을 열 수 있었던 것은 그 역시 덕후였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를 스포츠, 영화, 피규어 덕후라고 소개했다. 특히 스포츠에 관심이 많아 사내에서 야구, 농구, 자전거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다. 어릴 적에는 스포츠기자를 꿈꾸기도 했다.
그가 소싱한 상품들은 거의 스스로 마니아임을 자청하는 분야에서 나왔다. 지난달 '오덕후의 밤'을 통해 선보였던 야구 시즌권도 예외는 아니다. 홈쇼핑에서 한 번도 다룬 적이 없었던 상품이었기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컸지만 밀고 나갈 수 있었던 것도 덕후로서의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내외적인 상황도 맞아 떨어졌다. SK와이번스가 이색마케팅 차원에서 홈쇼핑 시즌권 판매를 먼저 제안했다. 서 MD는 프로야구의 인기가 높아지는데다 올해에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도 한국에서 열리는 만큼 덕후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는 점을 들어 회사를 설득했다.
연간 시즌권을 판매하는 온라인몰과의 차별성을 위해 단순한 구매를 넘어 야구 팬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방송을 기획했다. 서 MD는 "여자친구와 함께 야구장에 자주 가는데 진짜 마니아들은 응원단 앞에 모이더라. 여기서 착안해서 야구 응원가를 부르는 방송을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즐기는 방송에 덕후들이 모일 것이라는 예상은 적중했다. 이날 방송 결과 SK와이번스의 홈구장이 있는 인천지역 팬들이 시즌권을 다수 구매했으며 원정응원석과 어린이 회원권도 다수 판매됐다. 구단 측에서도 "마케팅 효과가 크다"는 피드백을 줬다. CJ오쇼핑은 이번 방송을 계기로 타 프로야구 구단과의 2차 방송도 기획 중이다.
CJ오쇼핑 '오덕후의 밤 시즌2' SK와이번스 생방송 현장. 사진/CJ오쇼핑
피규어·자전거 통해 덕후몰 가능성 엿봐
야구 이외에도 지난해 문을 연 피규어 전문몰 '토이즈샵(TOYS#)'과 명품 자전거 전문몰 '스페셜라이즈드'에서도 서 MD의 덕후력은 빛났다. 각각 2년째 피규어를 수집하고 있고 자전거 라이딩을 즐기는 서 MD의 취미생활이 반영된 곳들이다.
이 두 곳을 오픈할 때에도 주변에서는 회의적인 반응이 많았다. 서 MD는 수요가 꾸준히 늘고 있는 덕후 상품이 CJ그룹의 '그레이트CJ' 비전을 달성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큰 그림까지 그려가며 회사를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마니아들을 신규 고객으로 유치하면 다른 품목으로까지 확장시킬 수 있다는 점을 많이 어필했다"고 서 MD는 말했다.
결과적으로 토이즈샵과 스페셜라이즈드 모두 마니아층의 눈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토이즈샵에서 한정수량으로 판매한 '핫토이 아머트 베트맨'은 오픈 2분만에, '핫토이 데드풀'은 3분만에 완판됐다. 다양한 상품 라인업과 프로모션 등으로 달콤한 혜택을 준다며 피규어 마니아들 사이에서 '설탕몰'로 입소문을 타기도 했다. 한동안은 '설탕몰'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흑설탕과 백설탕을 판매 상품 상단에 올렸는데 이를 두고 마니아층으로부터 "약 빨았냐"는 반응도 나왔다고 한다.
토이즈샵보다 앞서 선보였던 스페셜라이즈드 몰은 덕후 상품의 성공 가능성을 엿보게 했다. 스페셜라이즈드는 자이언트, 베리다와 함께 세계 3대 자전거 브랜드로 꼽히는 곳으로 평균 단가가 250만원에 달한다.
서 MD는 "작년 반년간 판매액이 3억원이 조금 안됐지만 스페셜라이즈드를 취급하면서 다른 자전거 브랜드 7군데에서 연락이 왔다. 스페셜라이즈를 필두로 한 5개 자전거 브랜드 상품을 통해 4월 '라이드샵(RIDE#)'이라는 탈 것 전문몰을 오픈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서정남 CJ오쇼핑 e트렌드상품개발팀 MD. 사진/CJ오쇼핑
"상품 발굴 기준은 '덕후 커뮤니티'"
단순하지만 팔리는 덕후 상품을 발굴하는 비법은 '덕후'에 있다는 것이 서 MD의 답이다.
"(상품 선택의) 기준은 커뮤니티에 있다. 마니아들이 제일 기대하는 것을 그 곳에서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피규어로 따지자면 영화 '스파이더맨 홈커밍'이 개봉할 때 즈음에 어느 회사에서 어떤 피규어가 나온다는 뉴스가 커뮤니티에 공유된다. 사람들이 댓글을 달고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면 그 때 그 상품을 찾는 것이다. 그러면 불티나게 팔린다. 추상적이지만 답은 고객에게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팔아야지 마니아처럼 보이려고 구색만 갖춰선 안된다."
마니아층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함께 소통하는 것도 이들을 공략하는 주요 포인트다. 서 MD가 토이즈샵을 통해 지난달부터 선보인 '박까남(박스 까는 남자)'는 이른바 덕후들의 사이다 콘텐츠다.
제품의 박스를 여는 순간부터 실제 사용까지 세부적인 정보를 담은 영상으로 매월 3~4개씩을 만들어 선보이고 있다. 짧게는 3개월, 늦으면 1년까지 걸리는 예약판매 상품 비중이 높은 토이즈샵의 특성상 한시라도 빨리 상품을 보고싶어 하는 구매자들을 위해 만든 콘텐츠다.
서 MD는 "미리 구할 수 있는 상품이 있으면 찾아서 언박싱(unboxing)을 한다. 구매자들은 이 상품을 직접 만져볼 수는 없지만 영상을 통해 헛헛함은 채울 수 있게 된다. 그냥 세일 소식을 알리는 것을 넘어 어떤 상품이 입고됐는지를 직접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다른 상품까지도 쭉 훑어볼 수 있도록 한 트리거(촉매제)를 다는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앞으로는 VR에 주목
피규어와 드론 등 각종 키덜트, 덕후 상품이 쏟아지는 가운데 서 MD는 차세대 덕후 상품으로 망설임 없이 'VR(가상현실)'을 지목했다.
"VR은 키덜트의 범주가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의 범주가 될 것 같다. 사물인터넷(IOT), 디지털, 취미 등 기존 일상생활에 모두 침투될 것이라 본다. 조만간 상용화 할 것 같아 가장 눈여겨보고 있다. 아직은 VR 상품이 없어서 못 팔지만 지금부터 레이더를 세우고 관련 상품을 조금씩 팔아보려 한다. 그래야 진짜 시장이 열렸을 때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CJ오쇼핑을 '덕후의 성지'로 만들고 싶다는 서 MD의 반짝거리는 아이디어로 어떤 차세대 상품을 등장시킬지 기대된다.
원수경 기자 sugyung@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