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윤 칼럼니스트
1980년 5월 24일 밤, 전주시 서노송동 어느 하숙집. 누군가 창문을 두드렸다. 이 늦은 시간에 누굴까…하며 우리들은 창을 열었다. 창 밖에 있던 사람은 “광주에서 온 아무개 아버지인데, 우리 아들 하숙집이 맞냐”고 물었다. 문을 열어드렸다.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 남자가 들어섰다. 아들을 보자마자 껴안으며 “아이고 내 새끼야…”라고 한동안 흐느꼈다. 친구 아버님의 입에서 나온 말은 풍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들으면서도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 분은 “전주와 목포에서도 광주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가 돌아 3대 독자인 아들이 너무 걱정돼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봉쇄된 광주를 야산 길로 시 경계를 넘어, 굴비로 유명한 영광으로 가서 어선을 빌어타고 군산에 도착, 군산에서 버스로 전주까지 온 것이었다. 2시간이면 올 거리를 하루하고도 반나절 만에. (당시 전주는 고교입시평준화가 실시되지 않아 광주, 전남, 서울 등에서 유학 온 학생이 우리 학년에만 105명으로, 정원의 15%나 됐었다).
필자가 37년 전 일을 날짜까지 또렷이 기억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당시 고3이던 우리들은 ‘광주에서 시민들이 죽어간다’는 말을 바람결에 듣고(당시 서울에서 대학다니다 휴교령으로 내려와있는 선배들도 많았다) “이대로 있어서는 안되는 것 아니냐”며 시위를 하기로 했다. 친구 아버님이 창문을 두드린 그날 아침, 우리는 가방에 책 대신 돌멩이를 담아 등교했다. 그러나 ‘거사 정보’가 어찌 샜는지 학교에 당도하기도 전 학교로 가는 길목 곳곳에서 제지당하고 가방을 뺏겼다.
영화 <택시운전사> 영향도 겹쳐 광주가 재조명되고 있다. 비밀해제된 미국 문서에 의하면 80년 신군부 우두머리인 전두환 노태우 등은 월남전에 파병됐을 때 자행했던 것처럼 광주시민을 베트콩이나 빨갱이로 인식했다는 게 드러나고 있다. JTBC에 따르면, 수원과 경남 사천 주둔 공군에 “폭탄 탑재후 광주로 출격대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는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 80년 당시 광주에 있었던 아놀드 피터슨목사 부부도 헬기사격을 사진과 함께 증언하고 있다. 미군과 파월 한국군이 베트남양민을 학살했던 것 처럼, 시민들을 대검으로 찌르고 총으로 쏴 어딘가로 끌고가는 영상과 증언을 우리는 40년 째 보고 듣고 있다.
발포명령자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명령도 없었는데 광주에 투입된 군인들이 시민을 조준사격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당시 투입된 군인 전부를 군법재판에 회부해야 되는 것 아닌가. 법원이 “팔지도 복사하지도 말라”고 결정한 <전두환회고록>은 “북한 불순분자 수백 명이 광주에 잠입해 난동부렸다”고 적고 있다. 전두환회고록이 나오기 1년 전, 그는 언론인터뷰에서 “당시 광주에 북한불순분자가 있었다는 보고는 없었다. 북한 소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1년 사이에 극과 극을 오가는 그는 기억상실증 환자란 말인가.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헬기사격을 공식 확인했고, 공군 출격대기명령하달이 증언된 이상, 그리고 신군부 반란무리들이 광주시민을 베트콩으로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문서가 확인된 이상, 발포명령자는 재수사되어야 한다. 관련자들이 아직 살아있을 때.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3일 “헬기사격과 공군출격대기명령에 대해 특별조사하라”고 국방부장관에게 지시했다. 차제에 80년 5월 21일 전남도청앞 집단발포 최종명령자도 명명백백히 가려 처벌해야 한다. 현 상태대로라면 명령없이 군인들이 그저 총을 쏜 것일 뿐이다. 이 점이 밝혀지지 않는 한, 광주는 영원한 미제사건이다. 지난 5.18 광주민중항쟁 기념식에서 문 대통령은 추모사를 마치고 내려가는 유족을 조용히 뒤따라가 얼싸안고 위로하며 사과했다. 수 십년 묵은 원한과 통곡이 일시적이나마 해원되는 순간이었다. 그런 감정적 승화도 중요하지만, 발포명령자 규명과 처벌 없이는 진정한 해결이 아니다. 밝혀야 마침표가 찍어지는 ‘역사의 진실’ 하나가 아직 남아 있다. 살인진압 관련자들은 지금 80대 중후반이다. 알베르 카뮈는 말한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으면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이라고. 아직 그들이 살아있을 때, 촛불정권이 수십 년된 역사의 마침표를 찍기 바란다. 이 또한 촛불의 명령이자, 국민의 명령이다.
이강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