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조선도 블랙리스트 존재 "노동자 생존권 박탈하는 살생부"

양한웅 조선하청노동자 대량해고 저지 시민사회대책위 집행위원장
"노조 가입에, 심지어 산재 이유만으로 취업 제한…먹고 살 수 없게 해"
"블랙리스트는 반인간적 행위, 하청업체 노동자도 사람이다"

입력 : 2017-09-28 오후 3:07:05
[뉴스토마토 신상윤 기자] 시나리오 작가 달톤 트럼보는 영화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았다. 트럼보는 블랙리스트 피해자였다. 할리우드 블랙리스트 '할리우드 텐'에 이름이 오르면서 활동에 제약이 따랐다. 때문에 10개가 넘는 가명으로 활동해야 했다. 로마의 휴일 각본도 동료 이안 맥렐란의 이름을 빌려서 내야 했다. 결국 각본상은 트럼보가 죽고 나서야 제 주인을 찾을 수 있었다. 최근 국내에서도 문화예술계를 중심으로 블랙리스트 문제가 뜨겁다.
 
노동계는 오래전부터 블랙리스트 문제를 제기해왔다. 이달 초 금속노조는 조선업계 블랙리스트 실태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금속노조 조선업종 비정규직 블랙리스트 실태조사연구팀에 따르면, 조사에 참여한 조선업 하청 노동자 926명 중 405명(44.4%)은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고 답했다. 이들은 블랙리스트로 인해 취업에 대한 불이익 등의 피해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블랙리스트에는 하청업체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주로 등재됐다. 해당 조사를 처음으로 금속노조에 제안한 '조선하청노동자 대량해고 저지 시민사회대책위'(이하 대책위)는 블랙리스트의 공론화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양한웅(58) 대책위 집행위원장을 만나 조선업 블랙리스트의 문제점과 해결 방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조선업종 블랙리스트는 무엇인가. 왜 존재하는가.
 
문제를 일으킬 사람을 사전에 고용하지 않기 위해 만든 살생부와 같다. 노조 활동 경력, 노조 관련 모임을 시도한 이력, 불합리한 회사 조치에 항의한 사람 등이 등록된다. 심지어 산업재해를 당한 사람들도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담긴 것으로 확인됐다. 블랙리스트가 문건 형태로 존재하는지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노동자들의 조선소 출입 등록 과정에서 간접적으로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일감이 많은 대형 조선소는 하청업체를 통해 부족한 인력을 간접 고용한다. 하청업체에 취업한 노동자들은 조선소에서 일을 하기 위해 출입 등록이 필요하다. 이 과정이 전산으로 이뤄지는데,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은 출입 등록이 거절된다. 여러 명이 같은 조건으로 등록 신청을 해도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은 거절된다. 더 큰 문제 중 하나는 한 번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람은 다른 지역 조선소에서도 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형 조선소들과 하청업체들이 조직적으로 이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울산, 거제 등에서 공통으로 발생하고 있는 문제다. 기업들은 블랙리스트를 통해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고, 자신들의 경영환경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다.
 
블랙리스트가 주는 위압감은.
 
블랙리스트는 노동자의 기본권리를 넘어 생존권을 박탈한다. 한 하청업체 노동자는 노조에 가입해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조선업에서만 10년 가까이 근무한 숙련된 노동자였지만, 노조 활동을 이유로 다른 하청업체로 옮긴 뒤부터는 조선소 취업을 못 하고 있다. 또 다른 노동자는 산재 신청을 했는데, 그 뒤로 잔업이나 특근에서 배제당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사례들이 주변에서 발생하면서 다른 노동자들도 자연히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일을 해야 돈을 버는 만큼 결국 노동자들이 당연히 보호받아야 할 권리를 포기하거나 외면하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진 배경은.
 
5~6년 전 국내 조선사들은 고유가 시대에 글로벌 석유회사들로부터 다량의 시추선과 해양플랜트를 수주했다.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 대형 조선 3사를 중심으로 수주가 급증했다. 조선사는 이 선박을 건조할 인력이 필요했다. 보통 1척에 최소 5000명의 인원이 투입됐다. 그러나 정규직을 투입하면 인건비 등 부담이 있으니까 대부분 하청업체를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거 사용했다. 이들이 소위 '물량팀'이라고 하는 사람들이다. 조선소가 하청업체와 단기계약을 맺고 필요한 일을 맡기는 형태다. 선박 1개 건조하는 데 수백개의 물량팀이 투입됐다. 그런데 유가가 떨어지면서 석유회사들의 발주가 줄었다. 하청업체들도 할 일이 없어졌다. 2015년 조선업 구조조정이 본격화하면서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대량 실직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노조 활동을 했거나 목소리를 높였던 노동자들이 대거 블랙리스트에 오른 것으로 추정된다.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단체행동이 어려운 이유는.
 
조선업종은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 빅3를 중심으로 일이 진행된다. 대기업 조선사들은 각각 수백개의 하청업체(물량팀)와 사업계약을 맺고 일을 한다. 대기업 소속 정규직과 달리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으로 취업해 정규직의 일을 대신한다. 그런데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단체행동을 하려고 한다거나, 노조 결성 움직임을 보이면 조선사들이 해당 업체와의 계약을 해지해 버린다. 사람을 해고하는 것이 아니라 하청업체와 거래를 중단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많은 사람을 한 번에 밀어낼 수 있다. 노조를 만들려고 했던 노동자는 블랙리스트에 올라가게 돼, 더는 조선업종에서 일할 수 없게 된다. 이러다 보니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단체행동에 두려움을 갖게 된다. 조선 3사는 정규직 임금의 절반도 안 되는 수준으로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고용해 선박을 만들어 이윤을 남겼다. 그렇다면 하청 노동자의 생계에 대해서도 일정 부분 책임을 지거나 보호해 줄 필요가 있다.
 
안전사고가 하청업체 비정규직에 집중되는 것과도 연관이 있을까.
 
조선소 내 위험한 업무는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집중된다. 물량팀은 보통 팀장(조장)을 중심으로 20~30명으로 구성돼 함께 움직인다. 고용이 불안정해 일이 있는 곳을 찾아간다. 이들 중에는 숙련된 노동자들도 많지만 원청에 싫은 소리는 한 마디도 못한다. 블랙리스트에 오를 것이 두려워서다. 원청이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해줘야 하는데, 불만을 가진 물량팀은 아예 일을 안 줘버린다. 결국 작업 현장에서 갖춰야 할 안전장비라든지, 안전대책 등을 충분히 보장받지 못한 상태로 일을 하게 된다. 이런 문제들이 안전사고와 직결되는 것이다.
 
양한웅 조선하청노동자 대량해고 저지 시민사회대책위 집행위원장. 사진/뉴스토마토
 
앞으로 활동 계획은.
 
조선업종의 블랙리스트 문제를 계속 공론화해야 한다. 원청인 조선 3사에 대책을 요구하고, 정부의 관리감독을 촉구할 필요가 있다. 블랙리스트는 반인간적 행위다. 노동자의 기본권리인 노조 활동을 못 하게 하는 것은 불법이다. 그러나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기업과 싸울 개별적인 힘이 없다. 그래서 대책위가 발족했다. 소위 물량팀, 비정규직 조선 하청 노동자의 대량 해고를 막을 방법을 찾기 위해 나섰다. 노동계와 종교계, 학계 등으로 구성됐다. 블랙리스트 실태조사를 제안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대책위는 앞으로 두 가지 방향으로 활동할 계획이다. 가장 먼저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노조 설립을 도울 계획이다. 거제나 울산 등 조선업 중심 도시에서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조를 결성하겠다. 대상은 2만여명인데 10% 정도만 가입해도 2000명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블랙리스트 철폐와 노동권 보장 등을 업계에 요구할 계획이다. 또 정부와 시민사회 등에 블랙리스트 문제를 공론화하고, 대책을 촉구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블랙리스트를 철폐하고,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고용안정과 근로환경 개선 등을 마련할 계획이다.
 
지난 7일 국회에서 열린 조선산업 하청노동자 블랙리스트 실태조사 결과발표 토론회에 양한웅 집행위원장(왼쪽에서 4번째)이 참석했다. 사진/뉴스토마토
 
신상윤 기자 newma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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