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윤 칼럼니스트
숙의민주주의. 석 달간 익히 들어온 말이다. <위키백과>는 이렇게 정의한다. “숙의(deliberation)가 의사결정의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 형식. 합의적 의사결정과 다수결 원리를 모두 포함한다. 숙의민주주의에서 법을 정당화하는 최주요 요건은 단순한 투표를 넘어 실제적 숙의라는 점에서 전통적 민주주의 이론과는 다르며, 대의민주주의나 직접민주주의와 양립가능하다(하략)”. 요약하자면, 어느 이슈에 대해 몇몇 사람이 ‘여론’을 빙자해 결정하지 않고, 말 그대로 숙고에 숙고를 거듭하며 민주적 절차에 따라 결론을 도출하는 논의방식이다.
신고리원전 5,6호기 공사 중단 여부를 정부가 시민배심원단에 결정권을 넘겼을 때 일각에서 비판이 나왔다. 시민에게 넘길 거면 정부는 뭐하러 있느냐는 것이었다. 필자도 충분히 제기 가능한 비판이라고 생각했다. 진통과 논란 이 거듭됐지만 위원회는 고비를 말 그대로 자율적으로, 그리고 자유로운 숙의 속에 헤쳐나갔다.
결국 시민들이 자기 손으로 난제의 출구를 개척했다. 어느 신문은 “작은 대한민국으로 불릴 ‘현자’ 471명이 치유와 위로라는 선물을 줬다”고 제목을 뽑았다. 신문제목에서 보기 드문 감정 표현이다. 시민들의 결정에 감동했음을 대놓고 고백한 것이다.
관찰자들의 전언과 참여 시민들에 따르면, 시민들은 학습과 토론을 거치며 사고의 깊이와 넓이를 더해갔고, 자신의 편견을 수정해갔으며, 개중에는 입장을 완전히 바꾼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 어떤 강요도 없이 오로지 스스로 행한 일들이다.
필자는 시민위원단의 결론이 아니라,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 주목한다. 그 과정을 보며 숙의민주주의의 희망을 확인한다. 시민들은 ‘구호주의’나 ‘명분 지상주의’로 흐르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 ‘중우정치’라는 단어가 오랜 누명을 벗을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한다. ‘민중은 개돼지’라는 오만방자한 인식을 깰 근거도 확보됐다고 본다. 이 두 가지에 이번 시민위원회의 역사성과 의미가 있다. 여러 모로 의미있는 사건이자, 민주주의 공부의 진일보다. 숙의민주주의 실험과 공부를 통해 얻은 경험이 주춧돌이 돼 직접민주주의 확대로 이어지기를 소망한다.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1년 전인 작년 10월부터 6개월간 이 나라를 온통 바꿔놓은 촛불혁명 기간 내내 제기됐었다. 촛불혁명의 중요한 특징인 ‘지도부 없음-즉 시민 모두가 지도부’의 위력과 한계를 동시에 절감하던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대의민주주의의 문제점을 인식했다.
머슴들이 입으로만 굽신거리지 실제로는 감시나 견제가 쉽지 않았고, 그게 곪고 곪아 마침내 국정농단으로 터진 속내를 낱낱이 보면서, 도둑맞은 자신의 권리를 어떻게 지킬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정치일정은 너무 치열하고 촉박했다. 탄핵인용과 곧바로 치러진 대통령선거로 하루하루가 톱뉴스였고, 매일매일이 역사였다.
새정부 출범 두 달만에 새정부 대표공약이 시험대에 올랐다. 숙의민주주의라는 이름의 시험대에. 이번 시험을 통해 시민들은 집단지성과 민주성을 또 한번 확인했다. 그리스-로마식 직접민주주의는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그러나 그리스-로마시대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디지털혁명과 인터넷이라는 신병기를 통해, 직접민주주의가 결코 요원한 게 아님을 확인했다.
내년에 또 한 번 시끄러울 것이다. 지방선거와 개헌이 동시에 겹치기 때문이다. 다들 속셈과 노림수는 제각각일 터. 필자는 다음 사항은 확실히 쟁취되길 희구한다. 정당득표율-의석수 일치와 국회의원 주민소환제, 이 두 가지다.
최근 국정감사장에서 자유한국당 김진태 의원이 “헌법재판소를 내년 개헌에서 없애버리자”고 뇌까렸다. 헌법기관을 없애자는 건 말 그대로 헌법파괴적 발상이다. 이런 망발을 공공연히 한다는 건 공동체와 민주주의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헌법파괴적 의원이 권력의 유일하고도 신성한 원천인 국회에 있어도 되는지 의심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한 때 이런 구호가 유행했었다. “내집 앞 쓰레기는 내가 치운다”. 주민소환제란 딱 이 구호다.
이번 숙의민주주의의 토의 대상은 원전이었지만, 그 파장은 원전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전 국민은 471명의 ‘장삼이사’를 통해 민주주의 고액과외를 받았다. 고액과외 효과가 생각보다 크다는 걸 깨달았다. 숲을 지나오는 새 키가 훌쩍 커진 것이다.
이강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