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비정규직 방송 스태프도 ‘노동자성’ 인정 받아야”

센터 출범 뒤 방송 노동환경 소폭 개선…노조 결성되고 촬영대본에 인권 문구도 등장

입력 : 2018-08-24 오전 6:00:00
[뉴스토마토 신태현 기자] CJ E&M의 이한빛 조연출 PD가 세상을 떠난지 2년이 되어간다. 고인은 그 자신도 열악한 근무 환경에 시달렸지만, 더 열악했던 계약팀 비정규직에게 ‘갑질’해야 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tvN 드라마 <혼술남녀> 종영 다음날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가족들은 비정규직에게 따뜻했던 고인의 유지를 이어 작년 11월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이하 한빛센터)를 설립했다. 아버지 이용관씨는 센터의 이사장과 공동대표, 동생 이한솔씨는 이사를 맡았다. 22일 한빛센터에 있는 이 이사를 만나 그동안 고인의 바람대로 미디어 현장이 나아졌는지 물었다. 이 이사는 “스태프 노조가 만들어지는 등 작은 변화가 있었다”면서 “결국 그들이 ‘노동자성’을 부여받아야 근본적으로 문제가 해결된다”고 강조했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도처에는 고인을 기리는 흔적들이 있다. 와이파이 비밀번호 2개에는 이한빛 PD가 세상을 떠난 2016년 10월26일(1026)과 한빛센터 설립을 공식 발표한 2018년 1월24일(124) 숫자가 녹아들어갔다. 벽면에는 고인의 사진과 함께, 유명 PD가 된 다음에도 비정규직을 위할 것이라는 고인의 소신도 새겨졌다. 그렇다고 센터가 방문자에게 부담을 주는 분위기는 아니다. 센터가 있는 공간은 서울미디어노동자쉼터를 겸하기도 해서 비정규직·프리랜서 미디어노동자들이 편한 마음으로 찾고 있었다. 라운지 이름을 지어달라는 게시판에는 ‘쉼’ 내지 ‘쉼터’라는 단어가 제일 많았고, “너무 편안하다, 야간까지 운영해달라”는 등의 요구도 눈에 띄었다. 쉼터라고 해서 고요하지만도 않았다. 사무실은 끊임없이 제보 전화가 걸려오거나,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회의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날 이 이사는 “제가 한빛센터와 다른 단체들에 참여해 활동한데는 형의 명예회복을 지지해준 사람들에게 보답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말했다.
 
고 이한빛 PD의 진상규명 활동에 그치지 않고, 미디어 종사자 처우 개선에 뛰어든 계기를 듣고싶다.
 
‘tvN 혼술남녀 신입조연출 사망사건 대책위원회’가 CJ 사장에게 사과를 받고 한빛 PD의 명예회복이 이뤄진 것은 업계 종사자와 시민의 절대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지지한 이유는 한빛 PD 이야기, 그가 경험했던 아픔이 다수의 방송업계를 살아가는 종사자의 문제이면서 비정규직이나 청년 노동자 등 문제까지 내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업계 문제가 해결되도록 제도나 시스템, 문화가 바뀌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미디어종사자들의 처우개선 사업을 이어가게 됐다. 또 CJ가 사과의 의미로 준 기금을 활용할 필요도 있었다. 업계 문제를 해결하는데 활용하는 게 가장 고인을 추모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고인은 카메라 뒤에서 일하면서도 조명받지 못하는 ‘을 중의 을’이 노동 권리를 정당히 보호받고 존중받으며 살아가는 환경을 바랐다.
 
이한솔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이사가 CJ E&M 건물 앞에서 캠페인을 하고 있다. 사진/이한솔 한빛센터 이사 제공
 
이한빛PD가 고인이 된지 2년, 센터 활동 후 7개월이 돼간다. 그동안 미디어 종사자 처우는 얼마나 개선되었나.
 
일단은 제작 현장에서 서로를 의식하고 인정하게 됐다는 게 중요하다. 촬영대본의 맨 앞장에 언어 폭력, 성폭력, 과도한 노동 시간 등을 지양한다는 문구도 등장하고 있다. 종사자들이 그동안 (열악한 처지를) 말할 수 없다가, 이제는 쏟아낼 수 있는 공간들이 생겼으며 그들을 지지하는 단체가 존재한다. 제도가 완벽하게 좋아지지 않았지만, 조금씩 변화에 찬성하는 사람이 현장에서 많이 늘어났고 스태프 노조도 생겼다. 한빛센터를 의식하는 행동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현장에서 “잘못하다 한빛센터에게 제보간다”라는 말이 농담으로 회자되기도 한다.
 
주52시간 실시 이후 개선의 조짐이 엿보이는가.
 
52시간 적용은 내년부터 적용되는데, 현재의 턴키계약(총액을 정한 일괄계약)을 맺은 개별 계약팀 비정규직까지 적용될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기본적으로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한 상태에서 단순히 시간을 줄이는 것이 목표가 될 수는 없다. 노동자성은 방송사나 거대 외주 제작사가 사용 책임을 명확하게 지는 것이다. 지난 2월 센터가 고용노동부에 요구한 드라마 제작 현장 특별근로감독이 핵심 분수령이 될 수 있다. 감독 과정에서 위반사항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사용-근로관계가 명확하고 지시관계가 명확한지 등을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4월에 시작된 조사 결과가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다. 민감한 사항이고 드라마 산업 구조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으니 정부가 쉽게 결정내리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정부 5개 부처는 작년 12월 발표한 ‘방송프로그램 외주제작시장 불공정관행 개선 종합대책’의 세부 방안을 마련한 게 없다. 사실상 정부는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센터를 찾는 프리랜서 등 비정규직하고 이야기 해보면서 갖가지 고충을 들었을 것 같다.
 
제보로 이어질만한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다만, 지금은 드라마 스태프들이 하루 24시간을 일하는 ‘엉터리’, ‘난장판’이기 때문에 다른 문제가 있더라도 꺼낼만한 단계가 아니다. 노동시간과 이에 따른 임금착취로 문제제기가 수렴돼있다. 결국 노동자성 인정이 장시간 노동의 핵심 해결책이다.
 
방송사, 제작사뿐 아니라 현장 PD·작가·배우에게도 스태프 처우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일단 캠페인 차원에서 시작했다. 선의를 가지고, 본인의 드라마 제작 환경을 본인 권한 내에서 한번 더 고민하게 만들 수 있는 정도다. 다만 제작 환경은 산업 구조의 문제이기 때문에 개인의 캠페인 동참 여부가 큰 화두는 아닐 것 같다. 동참보다는 견제함으로써 일어나는 효과가 훨씬 더 크지 않을까. 최대한의 이윤을 뽑아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 강도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사람이 있어야 구조가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내년 센터 활동의 초점은?
 
내년을 말하기에 앞서 이제까지 해온 일들을 돌아보면, 대책위 싸움 종료도, 센터 설립도 생각보다 빨랐다. 남은 하반기는 (고 이한빛 PD) 추모제와, 센터 정착에 힘써야 한다. 내년은 저희가 중간지원조직으로서 정체성이 분명해지는 단계일 것 같다. 처음에 센터 준비할 때 노조를 지원하고, 쉼터도 제공하고, 다양한 제도 개선 위한 활동도 하도록 가닥을 잡았다. 이제 스태프 노조도 만들어지고, 이분들이 회의할 공간도 마련됐다. 내년에도 노조를 지원하고 재정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내고, 현장에 많이 알려지면 되지 않을까.
 
본인의 진로도 궁금하다. 청년단체 민달팽이유니온 사무처장에 이한열기념사업회 이사까지 맡은 걸 보면 하고 싶은 일이 많아보인다.
 
이한열기념사업회의 경우 예전에 1년 정도 상근자로 일을 한적이 있다.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인 배은심 여사께서는 제가 열사와 이름이 비슷하다고 많이 챙겨주셨다. 민달팽이유니온은 8년 전 창립 때부터 활동한 단체이고,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이 세 가지 일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남는 시간이 없다. 그래도 이런 일들을 할 때 가장 마음이 편하다. 다른 일 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을 제 자신이 안다.
 
업계 종사자와 시민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열악한 위치에 놓인 종사자들의 시선과 입장을 견지해, 실질적으로 실효성 있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지원 활동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편한 마음으로 저희를 신뢰하며 함께 참여해달라. 센터에 쉬러 오시고 이용해주시길 부탁한다. 시민들은 카메라 뒤 종사자들이 어떻게 드라마나 방송 컨텐츠를 만들어내고 있는지에도 많이 관심 가져주시고, 방송사가 제대로 못하면 따끔하게 비판도 해주시길 바란다.
 
지난해 4월24일 tvN ‘혼술남녀’ 신입 조연출 사망사건 대책위원회 회원들이 서울 마포구 CJ E&M 앞에서 고 이한빛 씨 사망사건 관련 기자회견을 열고 CJ E&M의 사과와 재발 방지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신태현 기자 htenglish@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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